◇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이어령 지음/212쪽·1만3000원·열림원
이호재 기자
지난달 26일 별세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을 생전에 만난 건 두 차례였다. 지난해 12월엔 문화창조자로서 그의 삶과 젊은 세대에 대한 조언을, 올 1월엔 성큼 다가온 병과 고통을 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딸 이민아 목사(1959∼2012)에 대해선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 고인이 작고한 뒤 세상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건 부녀(父女)의 인연이었다. 딸의 10주기를 앞두고 세상을 떠난 고인의 마음이 어땠을까 추측해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고인은 세간의 호기심을 다 알고 있었던 것만 같다. 세상을 떠난 뒤 처음으로 출간된 책에 딸을 위한 시들을 담았으니 말이다. 이 책은 ‘이어령의 유고시집’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가 생전에 구술하거나 집필한 시가 실려 있지만 그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쓴 딸에 대한 반성문은 유언처럼 읽힌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네가 혼자 긴 겨울밤을 그리도 아파하는데/나는 코를 골며 잤나보다//내 살을 내 뼈를 나눠준 몸이라 하지만/어떻게 하나 허파에 물이 차 답답하다는데/한 호흡의 입김도 널 위해 나눠줄 수 없으니”(시 ‘살아 있는 게 정말 미안하다’ 중)
항상 마음이 단단하고 자신감에 차 있던 가장은 딸이 떠난 뒤 시드는 꽃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여린 노인이 됐다. 고인은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누군가 울면/나도 따라 운다”(시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중)고 고백한다. 고인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혹시 너냐/그리워서 왔느냐/왜 문만 흔들고 가니”(시 ‘혹시 너인가 해서’ 중)라고 절규한다. “착신음이 들리면 혹시나 해서/황급히 호주머니에서/전화기를 꺼낸다”(시 ‘전화를 걸 수 없구나’ 중)는 문장에선 황망한 고인의 심정이 느껴진다.
생전 만났을 때 고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고 한다. 고인과 가까웠던 한 문인은 “그는 죽음을 기다린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고인은 시의 세계에서 딸이 생전 살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헌팅턴비치로 떠나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의 마침표를 찍는다.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시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중)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