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잘살게” 40세에 재무장관 올라… 카불 함락 직전 가족과 美로 도피 한해 7조원 국가예산 주무르다 하루 18만원 벌며 가족 생계 유지 “무너지기 쉬운 ‘카드로 만든집’ 지어… 자식들에 역사-투쟁 알려주고 싶어”
할리드 파옌다 전 아프가니스탄 재무장관은 아프간이 탈레반에 무너진 뒤 미국에서 우버 기사로 일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3월의 어느 날 해가 진 미국 수도 워싱턴. 혼다 어코드 한 대가 포토맥강 다리를 건너 조지워싱턴대 케네디센터 앞에 섰다. 우버 택시를 기다리던 여대생 두 명이 뒷좌석에 탔다. 둘은 “날이 너무 춥다” “지하철에서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최악의 날”이라며 수다를 떨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들은 요금에 4달러(약 4900원)를 추가해 ‘팁’으로 결제했다. 기사는 승객들이 내린 후 다음 호출을 확인했다. 그의 이름은 할리드 파옌다(41). 7개월 전만 해도 아프가니스탄의 재무장관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지난해 8월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탈레반의 공격으로 정부가 무너졌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이 20년간 이어오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끝이었다. 한때 한 해 60억 달러(약 7조3000억 원)의 국가 예산을 주물렀던 파옌다는 지금 미국에서 우버 기사로 일하며 아내와 자녀 4명의 생계를 근근이 책임지고 있다. 그는 “우리는 조국과 국민을 배신했고 비참하게 실패했다”고 18일 미 워싱턴포스트(WP)에 말했다.
파옌다는 열한 살 때인 1992년 아프가니스탄 내전을 피해 가족과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2002년 미국에 의해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자 고국에 돌아와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사립대’를 공동 설립했다. 2008년 미 일리노이대 유학 중 ‘풀브라이트 장학금’도 받았다.
불과 7개월이 지난 지난해 8월 탈레반의 공세에 수도 카불이 함락 직전에 몰리자 가니 대통령은 사태의 책임을 장차관들에게 돌리며 히스테리를 부렸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파옌다는 같은 달 10일 장관직을 사임하고 아내와 자녀들이 미리 도피해 있던 미국으로 건너갔다. 5일 뒤인 8월 15일. 전날 늦게 잠들어 오후 2시에야 일어난 파옌다의 휴대전화에 옛 동료의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슬픈 날이다.”
이날 탈레반은 카불을 포함해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장악하고 정부를 무너뜨렸다. 당초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던 가니 대통령 또한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하기도 전에 거액의 현금을 챙겨 해외로 도피했다. 각료들의 단체 채팅방에는 사태에 대한 분노와 충격의 반응이 가득했다. 파옌다는 “우리는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 20년간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무너지기 쉬운 ‘카드로 만든 집’을 지었다”고 토로했다. 특히 각료 중 몇몇이 마지막 순간에 도둑질을 선택해 국민을 배신했다고 전했다.
승객들은 그의 외모와 억양을 보곤 “어디 출신이냐, 미국에서의 삶은 어떠냐”고 묻는다. 그는 “적응하는 중”이라고 답한다. 술 취한 승객에게 욕설을 듣는 일도 잦다. 하루 6시간 우버 기사로 일하며 150달러(약 18만2000원) 정도를 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