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 무대책’ 집회 어떻게
민노총 전국택배노동조합이 지난달 2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2022 전국 택배노동자대회’를 열고 있다. 주최 측 추산 2000여 명이 참가한 이날 집회는 김재연 진보당 대선 후보의 선거유세 형식을 빌려 개최됐다. 현행 방역 수칙상 집회 등 행사는 최대 299명까지 참석이 가능하다. 뉴시스
유채연 사회부 기자
《지난달 21일 서울 청계광장은 ‘2022 전국 택배노동자대회’에 참가한 CJ대한통운과 한진택배 등 택배노조(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택배노동조합) 조합원 2000여 명(주최 측 추산)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대규모 집회·시위가 제한됐지만 이 행사는 별다른 제지 없이 진행됐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옥외집회를 주최하려면 사전에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지만 신고도 이뤄지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별다른 제한 없이 행사가 열릴 수 있었던 건 선거 유세 형식을 빌렸기 때문이다.
20대 대선 선거운동 기간 유세 형식을 빙자한 대규모 집회가 잇따르면서 코로나19 확산 우려가 제기됐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이었던 2월 15일∼3월 8일 선거 유세 형식을 빌린 대규모 행사는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만 5차례 열렸다. 대선이 끝난 지금은 이 같은 ‘꼼수 집회’가 열리지 않지만 6월 1일 전국동시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 기간(5월 19∼31일)에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 지지 호소 없는 선거 유세
주최 측 진행자는 틈날 때마다 “선거사무원과 노조가 참여한 진보당 선거 유세에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이라고 했다. 행사 성격이 선거 유세라는 점을 되풀이해 강조한 것이다. 한 참가자는 단상에서 “우리 택배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준 김재연 후보에게 힘찬 박수와 함성을 부탁드리겠다”고 했다. 대회 현장 한쪽에는 김 후보 포스터 3장이 붙은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이달 1일과 5일 청계광장에서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담임목사가 주최한 ‘1000만 국민 기도회’도 겉으로는 유세 형식을 빌렸다. 1일 오전에는 국민혁명당 소속 구본철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가 유세 차량 위에서 현 정권을 비판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낮 12시경 국민혁명당 선거 관계자가 무대에서 철수하고 ‘국민기도회’가 시작됐다. 사랑제일교회 목사 등이 연이어 연단에 올랐다.
○ ‘사전 금지’는 과도한 제약 소지
집회 주최 측이 유세 형식을 빌리는 이유는 방역 당국이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집회 인원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집회가 열리던 당시 연일 수만∼수십만 명의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쏟아졌고, 위중증 환자도 급증했다. 정부는 방역 지침을 통해 3월 1일 이후에는 백신 접종 여부와 관계없이, 2월 28일까지는 접종 완료자로만 구성됐을 때 최대 299명이 집회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택배노조 행사에는 2000여 명이 참여했다. 이달 1일 ‘3·1절 광화문 1000만 국민기도회’에는 경찰 추산 8000여 명, 5일 기도회에는 경찰 추산 4100여 명이 모였다. 집회로 개최했다가는 꼼짝없이 감염병 예방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었다.
하지만 선거 유세는 집회로 분류되지 않아 이 같은 인원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다.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공직선거법이 선거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이유로 규제나 제한을 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방역 당국이 유세 형식을 빌린 ‘꼼수 집회’를 모를 리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행사 시작 전 집회인지 선거 유세인지 판단해 집합 금지 등 행정 조치를 내리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장윤미 변호사는 “현장을 확인하기 전에 선거 유세인지 여부를 미리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인물 등을 사전에 확보해 검열하는 것은 헌법적 가치에 어긋날 소지가 크다”고 설명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선거 유세라는 목적을 벗어나는 행사가 이뤄져도 현행법상 사후 대처만 가능하다”라고 했다.
○ 선관위는 행사 내용 안 따져
경찰과 지방자치단체는 행사가 선거 유세인지에 대해 대체로 선거관리위원회의 판단을 따르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주최 측이 선거 유세 형식을 취하면 선관위가 관리 주체가 된다”고 했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7일 기자간담회에서 “경찰이 선관위의 현장 상황 판단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선관위는 행사에 이용된 차량 등이 유세용인지를 따질 뿐 행사의 내용을 두고 유세인지를 판단하진 않는 것으로 보인다. 월권 논란 등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선관위는 택배노조 대회의 경우 김 후보 측이 유세용으로 신고한 연설대담 차량을 이용했다며 “선거 유세가 맞는다”고 판단했다. 반면 ‘1000만 국민 기도회’는 후반부가 “선거 유세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오전까지는 구본철 후보의 연설대담 차량을 활용했지만 낮 12시경부터 다른 차량을 사용해 행사를 이어갔다는 것이다. 주최 측은 유세 차량에 붙어있던 구 후보 현수막을 기도회 현수막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이 같은 선관위 판단에 따라 경찰은 기도회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14일 기자간담회에서 “후반 행사 부분은 선관위에서 ‘선거 유세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고, 종교 집회 범위를 벗어난 부분이 있어 내사(입건 전 조사)에 착수했다”고 설명했다.
유세를 빙자한 대규모 집회에 대해 일선 방역을 책임지는 지자체는 우려가 크다. 서울시 관계자는 “(형식이 유세든 집회든) 수천 명이 모이는 행사가 열리면 감염 확산이 우려되는 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경찰 역시 악용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공직선거법이 각종 불법 시위·집회를 포장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정당한 경찰력 행사에 제약이 생기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장윤미 변호사는 “선거운동이라는 특수 상황을 감안해 인원 제한에 예외를 뒀는데, 타인의 피해는 아랑곳 않고 자신들의 의사 표명을 위해 악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 6월 지방선거 때도 재연 가능성
6·1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운동 기간까지 코로나19 확산세가 이어질 경우 ‘꼼수 집회’는 다시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를 편법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며 “엄중한 감염병 상황임을 감안해 성숙한 시민의식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윤광일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공직선거법상 제한 범위를 최소화하는 것은 필요하다”면서도 “감염병이 심각한 상황임을 고려해 다수의 군중이 운집하는 선거 유세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채연 사회부 기자 yc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