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장 이동하는 러시아군 전차들. 레닌그라드=AP/뉴시스
러시아군에게 납치돼 9일간 구타, 물고문과 전기충격 등 온갖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우크라이나 출신 언론인의 증언이 나왔다. 피해 언론인 니키타 씨(가명·32세)는 프랑스 공영 라디오 매체 ‘라디오프랑스’ 기자의 우크라이나 현지 취재를 돕는 이른바 ‘픽서(fixer)’로 근무 중이었다.
국경없는기자회(RSF)는 21일(현지 시간) 니키타 씨의 증언을 토대로 러시아군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고발했다. 니키타 씨의 신변 안전을 위해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아래는 니키타 씨가 RSF에 증언한 내용.
● 3월 5일 ‘러시아군 납치·고문’
5일 우크라이나 중부의 한 도시. 니키타 씨는 라디오프랑스 취재진을 호텔로 데려다준 뒤 ‘취재 차량(Press)’ 문구가 적힌 차량을 몰고 가족이 사는 인근 마을로 향했다. 러시아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그의 가족을 대피시킬 계획이었다. 이동하던 중 갑자기 러시아군이 그의 차량에 총격을 퍼부었다. 최소 30발 이상이 발사됐다. 니키타 씨가 몰던 차량이 나무를 들이받고 멈추자 군인들은 그를 차량에서 끌고 나와 바닥에 넘어뜨린 뒤 때리기 시작했다. 니키타 씨는 픽서로 일하고 있다는 증거와 함께 “나는 민간인이다”라고 수차례 얘기했지만 소용없었다. 러시아군은 근처 한 건물 안으로 니키타 씨를 끌고 갔다.
러시아군의 만행은 계속됐다. 군인들은 니키타 씨를 숲 속의 한 주둔지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100여 명의 군인들과 장갑차, 대포 등이 있었다. 군인들은 니키타 씨를 한 나무에 묶은 뒤 손가락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빼앗고 그가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겼다. 그날 오후, 군인들은 니키타 씨를 향해 총대와 쇠막대기를 휘둘렀다. 러시아군은 니키타 씨의 눈을 가리고 그를 다른 나무에 옮겨 묶었고 니키타 씨는 나무에 그대로 묶인 채 거의 사흘을 보냈다. 니키타 씨는 여러 번 의식을 잃었다. 그는 “마치 군인들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 3월 8일 ‘허위서약서 작성 강요’
8일. 러시아군은 니키타 씨와 다른 민간인 2명을 장갑차에 태우고 40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한 군인은 니키타 씨의 바지를 무릎 위로 올리더니 다리에 3~4번 전기충격을 가했다. 한번의 충격은 5~10초 이어졌다. 니키타 씨에게 1초는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군인들은 계속해서 “당신은 스파이고, 픽서라는 직업은 위장이다”라고 주장했다.
니키타 씨는 이후 물이 가득 찬 한 주택의 지하실에 이틀 동안 갇혀 지냈다. 그동안 군인들은 니키타 씨에게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한다’는 서약서를 작성하라고 협박했다.
● 3월 13일 ‘석방’
13일, 러시아군은 니키타 씨를 풀어줬다. 군인들은 니키타 씨와 고문을 당한 다른 민간인들을 숲에 남겨두고 떠났다. 그는 애초 납치된 이유도, 9일 뒤 풀려난 배경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니키타 씨는 현재 치료를 받고 회복 중이다. 그는 온몸에 멍이 들고 전기충격으로 다리는 퉁퉁 붓고 마비됐다. 검사 결과 그의 머리와 다리에서는 혈종(혈액이 고인 것)이 발견됐다. RSF는 8일 처음 라디오프랑스로부터 니키타 씨가 실종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니키타 씨가 탈출한 뒤에야 리비우의 언론자유센터를 통해 그와 접촉할 수 있었다.
RSF는 니키타 씨의 증언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출할 계획이다. RSF는 “니키타 씨는 러시아군이 언론인을 상대로 저지르는 전쟁범죄의 심각성을 확인해주는 섬뜩한 증언을 해주었다. 용감한 젊은 픽서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은 ICC에 그의 증언을 넘기는 것”이라고 밝혔다. RSF는 이미 4일과 16일 각각 우크라이나 방송탑을 공격한 혐의와 최소 8명의 언론인을 의도적으로 공격한 혐의로 러시아를 ICC에 제소했다.
신아형 기자 abr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