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지만 보수적이었던 고종, 양전사업 실시하고 공장 세우는 등 근대 자본주의 시장 기틀 닦았으나 재정-군사 장악해 황제권 강화 노려
고종은 강력한 절대군주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1899년 대한국국제 반포 후 프로이센(독일) 황제가 입는 군복을 입었다. 이환병 교사 제공
○광무개혁과 ‘황제권 강화’
광무개혁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즉, 구식을 근본으로 삼고 신식을 참고한다는 정책 이념을 추구했습니다. 광무개혁 시기 고종의 개혁적 모습은 ‘신참’의 정신에서 비롯되며, 구체적으로는 양전사업(量田事業)과 상공업 진흥책으로 나타났습니다.
광무개혁 초기 독립협회는 의회 설립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독립협회의 구성원들이 생각한 의회는 지식인 계층으로 구성된 상의원 수준이었고, 오늘날 국민이 선거로 직접 선출하는 국회의원과 의회 구성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고종은 독립협회가 추천한 인물과 정부가 추천한 인물로 의회를 구성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의회를 설립하면 황제권이 흔들릴 것으로 생각하였고, 당시 만민공동회가 백성의 여론을 끌어들여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불안해하였습니다. 결국 고종은 1898년 12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개혁의 방향을 황제권 강화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은 황제권 강화를 위해 재정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고종은 황제권을 강화하면 국권이 튼튼해지고 외세의 침략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백성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황실 위상 높이려 준경묘 조성
준경묘는 태조의 5대조인 이양무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종은 1899년 황실의 위상을 높이려 이곳을 국가의 보호를 받는 무덤으로 조성했다. 동아일보DB
태조 이성계는 4대조 목조까지는 왕으로 추증하고 종묘에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5대조인 이양무와 그의 부인의 무덤에 대해서는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종 때에 이양무의 무덤은 삼척 노동이라는 지역에, 그 부인의 무덤은 노동에서 아주 가까운 동산이라는 지역에 있다는 소문이 났고, 지방 관리들은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알렸습니다. 이후 세종, 성종, 명종은 삼척 노동과 동산에 관리를 파견해 묘지를 답사하고 무덤의 주인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객관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물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선조 때에는 정철이 강원 감사로 있으면서 두 무덤의 지형도를 그려 올리면서 묘를 다시 조성할 것을 청하였고, 현종 때에는 삼척 부사 허목이 두 무덤에 대한 여러 기록을 정리한 ‘척주지(陟州誌)’라는 책을 발행하고 묘의 조성을 다시 주장했습니다. 역대 왕들이 두 무덤을 성역화하지 못한 이유는 이양무와 그의 부인의 무덤이라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었고, 아무리 왕실이라도 추모에는 한계가 있다는 신하들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종은 1899년 조상에 대한 보은의 의리를 강조하면서 노동의 무덤을 다시 조성하고 준경묘라고 하였고, 동산의 무덤 이름은 영경묘라고 하였습니다. 이양무와 그의 부인이 죽은 지 670여 년이 지난 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무덤 앞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재실을 지었고, 비석에 새기는 글은 고종이 직접 작성했습니다. 또 관찰사가 묘지를 직접 관리하게 하고 청명에는 정부 행사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고종은 역대 왕들이 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해낸 것에 자부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준경묘와 영경묘를 조성하는 방법으로 황실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환병 고척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