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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강인한 생존력, 전쟁 참화 속 사람도 살린다

입력 | 2022-03-25 03:00:00

[식물에 말걸기]식물학자가 본 ‘전쟁과 식물’



신혜우 식물학자가 그린 식물세밀화 ‘민들레’. 신혜우 식물학자 제공


신혜우 식물학자·과학 일러스트레이터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 양측을 합해 수만 명이 죽고, 우크라이나를 떠난 난민도 300만 명을 넘겼다고 한다.

전쟁이 벌어지면 인간뿐만 아니라 수많은 생물이 헛된 죽음을 맞는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인간의 고통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지구에 존재하는 많은 종이 함께 죽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전쟁의 고통이 더 크고 참담하게 다가온다.

인간의 전쟁 속에 우두커니 서서 식물의 입장이 되어보자.》


총알 맞고도 100년 사는 나무



2011년 미국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의 참나무에 박혀 있던 총알. 사진 출처 ydr 홈페이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는 남북 전쟁을 통틀어 가장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의 아픔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국립군사공원이 생겼다. 전쟁이 발발한 지 148년이 지난 2011년, 공원 내 큰 참나무 하나가 쓰러졌다. 공원 관리자들이 나무를 치우기 위해 톱질하던 중 나무 둥치 속을 파고든 총알을 발견했다.

나무 둥치는 가장 중심인 수부터 크게 물관부, 유관속형성층, 체관부, 코르크형성층, 코르크층으로 조직을 구분할 수 있고, 기능에 따라 더 세부적으로 나뉜다. 수와 근처 물관부는 나무를 지탱할 뿐 사실 죽은 세포들이다. 이 때문에 나무 둥치의 속이 비었는데도 살아있는 나무들을 종종 만난다. 총알이 나무 둥치에 박히면서 바깥쪽 살아있는 세포 중 일부가 죽었지만 이 참나무의 생명을 앗아갈 만큼은 아니었다. 상처를 통해 바이러스에 감염돼 죽을 뻔한 고비도 잘 넘겼다. 결국 생명을 잃긴 했지만, 총알을 보듬어 품고 상처 난 부위를 스스로 치료해 148년간이나 버틴 것이다.

게티즈버그에서는 이 참나무 외에도 총 맞은 나무가 많이 발견됐다. 나무는 종과 나이에 따라 조직의 종류나 배열, 부피가 다르고, 총알이 들어간 깊이, 감염률 등에도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나무들은 이 참나무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떤 나무들은 아직도 총알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무가 총을 맞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북악산에도 김신조 사건 때 15발의 총을 맞은 소나무가 아직 살아있다. 전쟁의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나무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서도 우리에게 전쟁의 실상을 몸소 보여준다.


전쟁 생존자들 양식된 ‘민들레’

민들레는 전쟁 후 황폐화된 토양에서도 살아남아 전쟁 생존자들의 식량으로 활용됐다. 2월 24일 러시아의 공습 직후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의 모습. 포격을 받은 나무들의 둥치가 검게 타고 윗부분이 잘려 나갔다. 마리우폴=AP 뉴시스

군인은 전쟁터에서 주변 식물로 위장하기도 한다. 무작위로 잘린 식물 중엔 깊은 숲속에 살던 희귀식물이나 특정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고유종도 있다. 오래전부터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온 야생 식물은 그런 이유로 최후를 맞을 줄은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인간의 몸에 부착된 식물은 난생처음 터전을 떠날 기회를 갖지만, 곧 완전히 시들어 죽게 된다.

핵폭탄급 무기로 식물이 떼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다.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두 차례 핵폭탄을 투하했다. 엄청난 위력을 지켜본 뒤로는 암묵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식물 입장에서 이런 위력을 갖는 물리적, 화학적 무기는 여전히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 제초제가 대표적이다. 이 경우 수많은 식물이 한꺼번에 죽음을 맞고, 최악의 경우 멸종되기도 한다.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는 울창한 베트남 정글을 파괴할 정도로 강력했다. 식물인 척 위장해 자신을 숨기려고 식물을 해치던 인간이 반대로 숨어있는 적을 잘 발견하고자 식물을 죽인 것이다.

화살이나 칼을 들고 싸우던 때와 달리 현재의 전쟁은 자연에 오래도록 피해를 준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의 토양은 화학물질에 오염돼 식물이 자라는 데 필수적인 미생물까지 파괴된다. 일부 식물은 오염된 땅에서 살아남아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유럽이 원산인 서양민들레는 생존력이 강해 어느 곳에서나 잘 자란다. 전쟁 중에도 끝내 살아남아 사람들이 식량으로 활용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도왔다. 서양민들레는 화학물질 등으로 오염된 토양을 측정하는 지표로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귀화식물로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다.

예전에 참석한 세미나에서 어느 나이 지긋한 소설가가 6·25전쟁에 대한 기억을 들려줬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겪은 총격전이었다. 논에서 군인들이 총을 쏘고 있었는데, 민간인들은 총알이 날아드는 와중에도 모내기를 했다고 한다. 소설가가 묘사한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전쟁은 한 포기의 벼를 심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소멸로 평화 말하는 꽃



아닌 게 아니라 전쟁은 식물을 사라지게 하고 기근을 초래한다. 식량 생산에 쓸 노동력과 물자가 전투에 집중되는 데 따른 결과다. 옛 소련의 뛰어난 농학자이자 식물학자인 니콜라이 바빌로프. 그는 생물다양성이 기근 해결과 미래의 식량 개발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찍 깨닫고 종자 연구와 수집에 크게 이바지했다. 지금은 전 세계에 여러 글로벌 종자 은행이 있지만, 20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크고 선두에 있던 종자 은행은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던 ‘레닌그라드 종자 은행’이었다.

그는 동료 과학자들과 종자를 수집하고 관리했다. 그러나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스탈린은 당장 농사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미래를 위한 종자 수집을 부르주아 과학으로 치부했다. 결국 바빌로프는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의 과학자 그룹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나치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2년 넘게 봉쇄해 공격할 때 국가에서 버린 이 종자 은행을 끝까지 지켰다. 은행에는 먹을 수 있는 종자도 많았지만 끝내 먹지 않아 이들 중 9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역사에 기록된 이 어리석고 잔인한 만행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또다시 전쟁을 시작했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 난민에 관한 뉴스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크라이나 접경 국가인 루마니아와 폴란드에서 국경을 넘어온 우크라이나 여성들에게 꽃을 한 송이씩 나눠주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전쟁을 피해 막 타국에 들어선 여성들의 눈물 젖은 얼굴에 스치듯 미소가 번졌다. 꽃의 입장에선 곧 시들어 죽음을 맞이할 비극이지만, 위로와 평화를 선사해 전쟁을 멈출 수 있다면 그 희생이 헛되진 않을 것 같다.

신혜우 식물학자·과학 일러스트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