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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2차대전 폐허 속 런던 보랏빛으로 물들인 잡초

입력 | 2022-03-26 03:00:00

◇처음 읽는 식물의 세계사/리처드 메이비 지음·김영정 옮김/448쪽·1만8000원·탐나는책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질리언 페르난데스 모튼의 소설 ‘밤위드’ 표지(왼쪽 사진). 당시 독일 공군 폭격으로 폐허가 된 런던 시내 곳곳에 보랏빛 분홍바늘꽃이 피었다. 오른쪽은 영국의 1차 대전 참전 용사 추모석 앞에 놓인 양귀비꽃. GF 모튼 제공


1945년 5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일주일 앞둔 이날 영국 큐 왕립식물원 관리자는 런던 피폭 지역에서 못 보던 잡초가 자란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영국 런던 피커딜리 거리에 있는 세인트 제임스 교회가 폭격을 맞자 의용 소방대는 외벽에 물을 뿌렸고, 이후 습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고사리들이 건물을 뒤덮었다. 노란 꽃을 피우는 금방망이속은 런던 월의 깨진 벽돌 사이에서 자랐고, 맹독성 식물인 독말풀은 런던 중앙을 가로지르는 치프사이드 거리에 싹텄다. 런던 사람들은 곳곳에서 피어나 보랏빛 물결을 이룬 분홍바늘꽃에 ‘폭탄잡초’라는 별칭을 붙였다.

런던이 독일군의 공습으로 황폐화됐을 때, 폭탄이 휩쓸고 간 폐허에 가장 먼저 등장한 생명체는 다름 아닌 잡초였다. 자연과 식물을 다룬 30여 권의 책을 집필해온 저자는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 재빠름, 기회주의적 생활방식에 주목한다. 잡초는 농작물을 말려서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유독성으로 인간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악마적 존재로 치부되기도 했다. 저자는 못난이 취급을 받았던 잡초가 땅의 빈 공간을 메우고, 산사태나 산불로 복구되지 않은 초목을 치유하며 질병을 치료하는 약초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잡초를 박멸 대상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줄기에 호랑이 무늬가 있는 ‘무늬왕호장근’이다. 일본과 중국이 원산지인 이 풀은 19세기 중반 유럽에 들어와 정원 관목으로 인기를 끌었다. 무늬왕호장근은 점차 쓰레기 틈과 길가 배수로에서 자라고 교회 부속 묘지까지 침범하면서 영국에서 가장 위험한 외래 잡초종으로 낙인찍혔다. 1990년에는 환경보호법에 따라 해당 풀을 매립지에 폐기하라는 지침까지 내려왔다. 한때 이국적 모습으로 인기를 끌었던 식물이 돌연 뿌리 뽑아야 하는 침입종으로 돌변한 것이다.

저자는 인간중심적 사고로 식물의 유용성을 판단하는 대신에 ‘귀화’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라고 제안한다. 특히 기후변화로 토종식물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식물 공백을 채울 새로운 식물들의 등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원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물리치는 건 우리 작은 군도의 식물군이 점점 더 빈곤해지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영국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잡초를 사랑했다. 그의 작품에는 100여 종의 야생식물이 언급돼 있고, 그중 상당수는 영국에서 발에 차이는 잡초들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소네트 94번에서 이렇게 썼다. ‘여름철 꽃은 혹여 아무도 모른 채/홀로 살다 죽어도 여름을 향기롭게 하지만/그 꽃이 해충에 점령되면/가장 초라한 잡초도 그 꽃보다 더 품위 있을 것이다/가장 향기로운 것도 그 행위로 가장 역겨운 것으로 바뀌나니/썩은 백합은 잡초보다 더 고약한 악취를 풍긴다.’ 화려한 꽃보다 잡초가 더 품위 있고 향기롭다고 노래한 셰익스피어처럼, 길거리에 마구 피어난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관찰해보는 건 어떨까.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