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권의 공기관 인사 이중 잣대, 산업부 블랙리스트 전격수사 나선 檢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 때 못 밝힌 청와대 윗선 의혹 이번엔 밝혀내나
천광암 논설실장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 수호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규범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自制)를 꼽았다. 법체계에는 본질적으로 개념적 공백과 의미의 모호함이 내포돼 있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의견을 인정하는 ‘상호관용’과 법적인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제도적 자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중 제도적 자제의 경우 민주주의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절대왕정 시대의 유럽 군주들조차도 지나친 권력 행사를 자제했다는 것이다.
임기가 두 달도 안 남은 문재인 정권의 알박기 인사에 대한 탐욕이 끝없다. 대표적 탈원전 인사인 김제남 전 대통령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지난달 10일 임기가 시작된 한국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에 앉히더니, 한국은행 총재와 감사위원 인사에까지 집착하면서 신권력과 갈등을 빚었다. 감사위원의 경우 제청권을 가진 감사원의 ‘반란’으로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알박기 전반에 마침표가 찍힐지는 의문이다. 합법인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이다.
박수현 대통령국민소통수석은 16일 낙하산·알박기 인사 논란과 관련해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인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임원의 임기는 정부가 바뀌더라도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문 정권이 ‘제도적 자제’를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기대난이라고 치더라도,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운운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
김 장관과 신 비서관은 2017년 11월경부터 산하기관에 심을 인사들의 리스트를 미리 만든 뒤, 민관 후보추천위원회에 참여하는 환경부 공무원들로 하여금 ‘바람잡이’ 역할을 하게 하거나 역량에 관계없이 높은 점수를 주게 했다. 또한 낙하산 인사용 자리를 만들기 위해 멀쩡히 임기가 남은 산하기관 임원들로부터 사표를 받았고, 버티는 임원에 대해서는 ‘표적감사’를 벌여서 밀어내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크다. 이 사건의 항소심 판결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청와대가 추천·임명하는 몫의 공공기관 직위에 대해서는 청와대 인사수석비서관이 주재하고 소관 수석비서관이 참여하며 피고인 신미숙이 실무를 주관하는 청와대 인사간담회에서 단수 후보자를 선정하였고….’
청와대 내 신 비서관의 ‘윗선’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랬던 검찰이 25일 산업부 사무실을 전격 압수수색 했다. 고발장이 접수된 지 3년 2개월 만에 ‘산업부 블랙리스트’를 정조준하고 나선 것이다. 검찰이 3년 넘게 사건을 뭉개다가 ‘윤석열 인수위’ 출범이 무섭게 칼을 뽑아 든 모습이 그다지 순수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당시 산업부 산하 공기업 사장 등이 임기를 남겨 둔 상태에서 사표를 낸 객관적인 사실이 있고, 자의(自意)에 반한 사표였다는 증언도 나오는 만큼 누구도 검찰의 수사를 막을 명분은 없다. 기왕 하는 수사라면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운만 뗀 윗선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도 명확한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그래야 문 정권을 비롯한 역대 정권들이 공공기관 임원 자리를 선거 전리품으로 여기면서 무자격자들을 마구 내리꽂아 온 오랜 ‘적폐’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