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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르포]“러 미사일 언제 날아올지, 하늘 보며 공포에 떨어… 어제 저녁만 3차례 경보”

입력 | 2022-03-29 03:00:00

[우크라 서남부 현지 르포]




“자꾸 하늘을 보게 돼요. 언제 머리 위로 러시아군의 미사일이 쏟아질지 모르니까요.”

28일 루마니아 국경과 가까운 우크라이나 서남부 도시 체르니우치 시청 앞 광장. 봄 햇살이 비치는 화창한 날이었지만 거리에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민들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사이렌 소리에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극도의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시 당국은 우크라이나 서남부 지역 상공에 비행물체가 출몰하거나 도시 주변에서 폭발음이 들리는 등 특이사항이 감지될 때마다 수시로 사이렌을 울리고 있다.

이날 오후 중앙극장에서 화재 신고가 접수돼 소방차 여러 대가 도심을 가로지를 때도 시민들은 굳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한 시민은 “요즘엔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도 공포”라고 했다. 그는 전날에도 저녁에만 경보가 3차례 울려 지하실 등 대피 장소를 찾아 헤맸다고 했다. 수도 키이우에서 피란을 온 30대 여성 이리나 씨는 기자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열흘 전 체르니우치에서 100km 남짓한 거리의 이바노프란키우스크 지역에도 러시아가 미사일 폭격을 했어요. 단언컨대 우크라이나에서 안전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지난달 24일 침공 이후 약 한 달간 우크라이나 전역에 1100기가 넘는 미사일을 발사했다.




영토 양보 없다던 젤렌스키 “러 점령 돈바스 타협할 수 있다”


“땅 중요하지만 많은 생명 구해야”… 영국 주간지와 인터뷰서 강조
빠른 종전 위해 현실적 선택 분석… 시민들 “끝까지 싸우겠다” 비장
“이제 안전지대 없다” 불안한 나날… 공습 사이렌에 기자도 지하 대피
“러, 한미일 국민 입국 금지 예정”



28일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에서 공습경보가 울리자 지하 은신처로 대피한 10세 소녀 타냐가 벽에 희망을 바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은신처 벽에는 폭격의 공포를 달래려는 듯 여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체르니우치=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28일 기자가 우크라이나 서남부 체르니우치 도심을 취재하는 동안에도 “이이이이잉” 하는 공습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기자는 시민들을 따라 인근의 지하 은신처로 대피했다. 함께 가던 소피아 씨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쓰고 폐쇄됐던 방공호인데 최근 다시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400명이 대피할 수 있는 이 은신처에는 방이 10개 있었다. 벽면 곳곳에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꽃과 문양 등이 그려져 있었다. 대피한 시민들이 불안감을 달래며 그린 그림이었다. 벽면에 꽃을 그리던 10세 소녀 타냐는 “죽을 수도 있어서 무섭지만 살아야 한다는 희망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체르니우치에는 이런 지하 은신처가 68곳 있다.
○ 공습 사이렌에 기자도 함께 대피
체르니우치는 루마니아 국경으로부터 40km 떨어진 인구 26만 명의 도시다. 우크라이나 북동부와 달리 러시아군의 공격을 거의 받지 않았다. 헝가리 루마니아 등 인접국 국경을 넘지 못한 피란민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주우크라이나 한국대사관 임시 사무소를 비롯해 각국의 임시 대사관도 있다. 하지만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촬영하면 안 됩니다. 건물 사진이 보도되면 러시아군의 폭격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기자가 시청 광장 주변 건물을 카메라로 촬영하려 하자 한 경찰관이 달려와 막아섰다. 그의 목소리에서 경찰로서의 의무감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시민으로서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40대 사업가 유리 씨는 “인근 지역마저 러시아군 최첨단 무기의 폭격을 받고 있다. 너무 불안해서 보드카라도 잔뜩 마셔야 잘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시민들은 “언젠가는 우리 차례 아니겠느냐”며 “우크라이나에 안전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고 했다.

18일 체르니우치에서 100km 거리인 이바노프란키우스크 지역의 델랴틴 일대가 러시아군 극초음속 미사일 ‘킨잘’에 초토화됐다. 러시아가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킨잘’을 실전에서 사용한 것은 처음인 만큼 서남부 지역도 긴장이 높아졌다.

체르니우치 시민들은 “남부까지 전쟁이 번지면 끝까지 싸우겠다”는 비장함을 보이고 있다. 블라디슬라우 아트로시첸코 체르니우치 시장은 러시아군이 도시를 공격할 경우 시민들에게 민병대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러시아군 장갑차와 전차를 파괴하면 15만∼25만 흐리우냐(약 600만∼1000만 원)의 포상금을 주기로 했다.
○ 젤렌스키 “러와 돈바스 타협 가능”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9일부터 터키에서 5차 평화 협상을 시작한다. 협상에 앞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현재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이 일부를 장악한 동부 돈바스 지역에 대해 러시아와 타협할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도 논의 가능하다고 밝혔다. 영토 문제에 대해 양보할 수 없다던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도 “전쟁에서 승리는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며 “우리 땅은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토일 뿐”이라고 말했다.

고전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하기보다 둘로 쪼개기 위해 동남부에 전력하려 한다는 판단에 따라 현실적으로 빠른 종전을 택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키릴로 부다노우 우크라이나 국방정보국장은 “푸틴은 ‘한국형 (분단) 시나리오’를 모색하고 있다”며 “동남부의 러시아군 점령 지역과 나머지 비점령 지역을 분단시키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28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는 한국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비우호국가’ 국민의 러시아 입국을 금지하는 법령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서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체르니우치=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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