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세인 요르단 국왕에게 전화할 것
2) 무사 리비아 정보국장에게 전화할 것
3)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에게 전화할 것
4) 다른 의원들에게도 전화 돌릴 것
5) 중국과의 회담 준비
6) 무지방 요거트 살 것
최근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별세했습니다. 대다수 직장인들처럼 그녀도 장관 시절 하루 주요 일정을 포스트잇에 적어서 집무실 책상에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자서전 ‘마담 새크리터리’에 소개된 1998년 1월 28일 일정입니다. 자서전에 나온 올브라이트 장관의 설명에 따르면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날이라는데 미국 외교의 책임자답게 빡빡한 일정입니다.
1959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의 결혼식. 명문 여대 웰슬리 칼리지를 졸업한 올브라이트 장관은 대학시절 열렬한 연애 상대였던 조지프 올브라이트와 졸업식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자서전 ‘마담 새크리터리’
올브라이트 장관의 외교적 업적은 널리 알려졌지만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여성으로서 그녀에 대해 공개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혼 경력이 있다는 것 정도가 알려졌습니다. 대부분의 장관들이 백악관에서 열리는 임명식 때 배우자가 옆에서 성경을 받쳐주는 것과 달리 1997년 올브라이트 장관 선서식 때는 딸들이 옆자리를 지켰습니다.
1997년 미 국무장관 선서식 때 올브라이트 장관(왼쪽)과 함께 참석했던 세 명의 딸. 현재 판사, 변호사, 자선단체 경영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더타임스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남편의 결정력 장애는 이혼 과정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남편은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이혼을 할지 말지 망설여진다”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당시 퓰리처상 후보로 올라있던 남편은 “상을 타면 이혼을 안 하고, 상을 못 타면 이혼을 하겠다”는 해괴한(?) 조건까지 내걸었습니다. 퓰리처상 수상이 불발로 돌아갔기 때문인지 1982년 부부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혼이 많은 미국이지만 공직에 진출한 정치인들은 원만한 결혼생활이 성공의 잣대가 되기 때문에 쉽게 이혼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생 중반인 45세에 이혼을 택한 올브라이트 장관은 “이례적인 케이스”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최근 그녀의 부고 기사에서 전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1984년 대선 때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제럴딘 페라로 하원의원(오른쪽)의 과외교사를 맡으며 외교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의 교습 덕분에 페라로 후보는 TV 토론에서 조지 H W 부시 부통령(왼쪽)과 대등한 대결을 펼쳤다. 미 의회방송 씨스팬 캡처
페라로 후보는 대선 TV 토론에서 조지 H W 부시 부통령과 대결하며 까다로운 핵관련 이슈들도 척척 받아넘겼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의 주가도 함께 올랐습니다. 이후 조지타운대에서 테뉴어(종신교수직)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그녀의 이름 옆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가며 능력을 눈여겨보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2년 당선 후 인수위원회 외교정책 담당 자리를 맡겼습니다. 클린턴 행정부 출범과 함께 유엔주재 미국대사, 국무장관에 오르며 자신의 목표를 이뤘습니다.
과외 공부를 계기로 알게 된 올브라이트 장관과 페라로 의원은 평생 친구가 됐습니다. 훗날 페라로 의원은 올브라이트 장관에 대해 “가르칠 자료들로 터질 듯한 가방을 들고 비행기 트랩까지 나를 마중 나올 정도였다”며 “이런 열성의 뒤편으로 이혼 후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려는 결심이 보였다”고 회고했습니다.
뉴욕 아트디자인 박물관에 전시된 올브라이트 장관의 브로치들. 보석으로서의 가치는 크지 않지만 미국 외교사에 남는 상징적인 장식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욕 아트디자인 박물관(MAD) 홈페이지
개인사에 대한 얘기를 꺼리는 올브라이트 장관은 1999년 한 강연에서 “이혼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덕분에 오늘 여러분 앞에서 박수를 받는 위치에 서게 됐다”는 농담으로 좌중을 웃겼습니다. 인생에서 이혼을 포함한 여러 고난을 만나게 되지만 이를 통해 자유로워지는 부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한 결정을 하는 삶을 사는 기쁨”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