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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중현]성공한 한국은행 총재 만들기

입력 | 2022-03-31 03:00:00

한은 독립성 위협하는 ‘날 선 정치’
소신과 강단 있는 통화정책 펴야



박중현 논설위원


“아무래도 잠재성장률이 5%가 안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직원들 시켜서 시스템을 다시 돌리고 있어요.” 2003년 9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당시 한국은행 조사국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임 김대중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발급 기준을 지나치게 완화한 탓에 신용불량자가 폭증하는 ‘신용카드 사태’가 시작되고, 외환위기 이후 눌려 있던 노사분규까지 폭발하고 있었다. “잠재성장률을 7%로 끌어올리고, 10년 안에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성장 공약은 첫해부터 삐걱거렸다.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한 나라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한계가 잠재성장률이다. 지금은 2% 안팎 잠재성장률에 익숙해졌지만, 1998년 외환위기로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가 이듬해 11.5% 플러스로 돌아서 고속성장을 계속하던 당시 ‘5% 붕괴’는 경제의 기초체력에 큰 탈이 났다는 뜻이었다. 며칠 후 익명의 ‘한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잠재성장률 4%대 예고…한국 저성장 시대 진입’이란 제목의 1면 톱, 3면 전면 기사를 썼다.

비판적 보도에 대한 정권의 반응이 날로 과격해지던 시절이었다. 신문이 배달되자 한은에선 큰 소동이 벌어졌다. “사실무근이다. 한은 관계자 중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자료가 기자실에 배포됐다. ‘정권 실세’ 청와대 관계자가 한은 부총재에게 전화해 “당장 부인 보도 자료를 내고 발설자를 색출하라”고 주문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래도 기자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취재원을 찾아낼 순 없었다. 박승 총재 등 당시 한은 수뇌부도 적발되면 인사 등에서 불이익을 당할 게 뻔한데 국가 경제를 걱정했다는 이유로 발언자를 찾아낼 의지는 없었을 것이다. 석 달 후 한은은 ‘한국 경제의 장기 성장기반 확충을 위한 과제’란 제목의 보고서를 슬그머니 내놨다. “2000∼2003년 잠재성장률은 4.8%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한 줄 들어 있었다. 그해 한국은 3.1% 성장했다.

11년이 지난 2014년 박근혜 정부 2년 차에 한은 총재에 취임한 이주열 ‘전 조사국장’을 만났다. “총재가 되기까지 두 번 큰 위기를 겪었는데, 그중 한 번이 당신이 쓴 기사”라고 말해 같이 웃었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서 연임됐다. ‘소득주도 성장론자’를 요직에 대거 중용한 현 정부도 중앙은행 총재까지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비주류로 바꿀 자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임기 8년이 편치만은 않았다. 우파, 좌파 가리지 않고 경제가 어려워질 때마다 집권 세력은 한은에 무리한 주문을 했다. 세월호 사고 후 침체된 경기를 끌어올리려고 박근혜 정부는 한은에 금리 인하를 압박했다. 현 정부 여당 국회의원들은 재정을 퍼 쓰는 것도 모자라 한은이 국채를 인수해 돈을 더 찍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흔들리는 듯한 순간도 있었지만 미국의 긴축에 앞서 작년 8월부터 금리를 올리는 등 ‘인플레 파이터’로서 본분을 지켜냈다.

오늘로 이 총재의 임기가 끝난다. 후임은 공석이다. 신구 권력의 인사권 기 싸움 끝에 이창용 전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국장이 후보로 지명됐지만 인사청문회 문턱을 넘어야 한다. 이견이 별로 없는 준비된 총재감인데도 정치적 부담을 지고 출발해야 하는 게 안타깝다.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는 커지고, 몇 년 뒤 잠재성장률 1%대가 무너질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미국의 대공황,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30년’에는 중앙은행의 실패한 통화정책이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은의 신임 수장이 반드시 성공한 총재가 돼야 하는 이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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