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세탁부’, 1886년.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작업대 위에는 다려야 할 세탁물이 놓여 있다. 19세기 파리의 여성 세탁부를 그린 이 그림은 툴루즈로트레크의 초기 대표작이다. 귀족 가문 출신의 화가는 왜 신분이 낮은 노동자 계층 여성을 모델로 그린 걸까?
툴루즈로트레크는 남프랑스 알비의 이름난 귀족 가문 출신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뼈가 약한 유전적 질환도 함께 물려받았다. 이는 혈통 보존을 위한 근친상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3세 때 넘어져 오른쪽 대퇴골이 골절됐고, 14세에는 왼쪽 다리마저 부러진 후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장애를 갖게 됐다. 또래의 귀족 남성들이 즐기던 승마나 사냥을 할 수 없게 되면서 혼자 할 수 있는 미술에 관심을 두었고, 성인이 되자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 이 그림은 미술학도 시절이던 22세 때 그렸다. 그림 속 모델은 카르멘 고댕이란 이름의 성노동자 여성이다. 당시 많은 세탁부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밤에는 성노동자로 일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해도 생계를 해결할 만큼 보수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툴루즈로트레크는 그림 속 인물에 대한 선입견이나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 그림에서만큼은 세탁부 여성의 고된 삶에 대한 동정심과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고댕은 일을 잠시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창 너머 세상은 그녀가 꿈꾸는, 그러나 오지 않을 더 나은 미래를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툴루즈로트레크는 가식적이고 잘난 체하는 귀족들보다는 몽마르트르의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평생 그들의 친구로 살았다. 밤마다 스케치북을 손에 들고 밤업소를 배회하며 그들을 관찰하고 그렸다. 치열한 노력으로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유화 737점을 포함해 5000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천재적 예술가의 운명이 그렇듯, 알코올의존증과 매독, 정신착란에 시달리다 37세에 요절했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