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의 포격이 집중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예술극장에 피난해 있으며 처절한 생존투쟁을 벌이다가 폭격을 당했다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3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예술극장 조명기사인 에브게니야와 남편 세르게이는 이곳에 2월25일 처음 피신해 온 뒤 수십명을 이곳으로 피신시켰다.
공중, 바다. 육지에서 쏟아 붓는 포탄이 주거 건물 대부분을 파괴하면서 45만 마리우폴 시민들을 위협했다. 극장이 마지막 남은 대피처가 됐다. 대부분 극장 공연을 관람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폭격에 집을 잃게된 사람들이다. 극장도 곧바로 전기, 식량, 수도가 끊어졌고 화장실은 6개뿐이었다.
에브게니야는 “모두들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정말 미친 짓이었다. 사람들을 어떻게 통제해야 할 지 몰라 겁이 났다”고 했다.
이런 혼란 속에 작은 사회질서가 생겨났다고 이곳에서 지내다가 탈출한 몇 사람들이 전했다.
처음 에브게니야와 세르게이는 여성과 아이들만 받아들였다. 두 사람도 자식들을 데려와 당분간 머물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 극장 문을 열었다.
마리우폴은 인터넷 통신망이 망가져 소식이 끊겼다. 해가 밝으면서 러시아의 폭격이 잦아들면 사람들이 암흑속 지하에서 나와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마리우폴에서 탈출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러시아 정부가 지난 5일 마리우폴에서 탈출하는 인도적 경로를 개설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주민들이 극장앞에 모여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러시아는 탈출로를 폭격했다. 탈출로가 사라지자 수백명이 극장에 다시 몰려들었다. 매트리스와 담요, 베게, 식품, 물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극장에 사람들이 넘쳐나면서 자리다툼이 벌어졌다. 안나가 극장에 온 지난 7일 건물내에서 가장 따듯하고 안전한 지하실에 빈 자리가 없었다. 50명이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그보다 몇 배 넘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극장 로비와 복도 의상실에도 사람들이 가득 찼다.
유통회사에서 근무하던 안나는 1층 구석에 13살짜리 아들과 자리를 잡았다. 베니어판으로 막은 창문 바로 옆이었다.
사람들이 곧 2층과 3층까지 가득 찼다. 발코니 공연석 좌석을 비집고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 관람석 의자 매트를 뜯어서 방석이나 침대매트로 쓰는 사람도 많았다.
밤새 아이가 울었지만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했다. 아들과 함께 극장에 머물렀던 올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조우스탈철강의 전기기사로 전쟁 발발 3일 뒤 극장에 합류한 샤사가 “모두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에브게니야가 새로 오는 사람들 자리를 정해주는 일을 맡았다. 남편은 시청을 닥달해 지역 적십자사, 경찰, 자원봉사대의 도움을 구했다.
치약, 촛불, 화장지, 위생용품, 기저귀, 이유식 등이 조금씩 공급됐다. 에브게니야와 세르게이 부부는 물건들을 저장하고 질서있게 배급할 곳을 찾았다. 에브게니야가 극장 내 창고를 정하고 창고 지기를 지정했다. 에브게니야를 비롯한 몇 사람이 사무실에 응급실을 만들고 의사와 간호사를 찾아서 배치했다.
올하는 “에브게니야와 남편이 모든 것을 이끈 기둥”이라고 했다. 공연에 사용되는 소파에서 자는 부부가 사람들이 무대를 뜯어 불피우는 것을 막았다.
일단의 남자들이 극장 인근 아이스링크 주변 울타리를 뜯어서 장작을 공급했다. 인근에서 떠온 산업용수를 끓여서 마실 수 있게 했다.
쓰레기를 수거해 극장 뒷편에서 드럼통에서 소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기기사 두 사람이 발전기를 만들어 휴대폰을 충전하도록했다. 몇 몇 여성들이 화장실 청소를 맡았다.
곤초로바는 “정말 잘 돌아가는 조직이었다”고 했다. “모두가 톱니바퀴처럼 일했다”는 것이다. 종업원이 코트를 받아 걸어두던 의상보관실에서 자원자들이 따듯한 옷과 기저귀, 유아식을 나눠줬다. 의상보관실에 번호표를 목에 건 사람들은 경찰역할이었다. 이들이 식수원을 차단하려는 사람들을 막았다.
나우카는 “끔찍한 사회적 실험에 참여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먹을 것이나 식수를 받기 위해 줄 서있는 동안 사람들은 극장에 오게된 과정을 서로 주고 받았다. 한 여성은 집밖에서 불을 피워 요리를 하는데 미사일이 집을 박살냈다고 했다. 극장에서 본 공연을 회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낮동안 몇몇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 다리를 펴고 담배를 피웠다. 극장 경비가 한 번에 10명 이상은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다.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면 모두가 급해 안으로 달려왔다.
어느날 현지 경찰이 야외 조리대를 들고 극장에 왔고 몇 사람들이 나서서 요리를 했다. 감자와 당근을 깍고 고기와 닭, 생선을 잘랐다.
돌아다니면 물건을 구해오는 남자들이 폭격 맞은 빵집에서 밀가루와 빵틀을 구해와 여자들이 빵을 구웠다.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식기와 침구를 가져오기도 했다.
하루 식사일정이 생겨났다. 동트기 직전 남자들이 장작불을 피웠고 7시경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모닝티와 커피를 만들어 2시간 동안 나눠줬다. 아이들을 대신 줄서기하도록 시키는 부모들도 있었다. 8시에 에브게니야가 각 부문 책임자들과 모여 급한 문제 해결을 논의했다.
자원봉사자들은 아침에 간단한 스낵을 점심엔 닭고기와 쌀로 만든 스프, 부야베스, 보르시치를 먹었다. 여성과 아이들, 노인들이 먼저 식사했다. 저녁에는 요리사가 부서진 상점에서 구해온 소시지와 고기로 요리를 했다. 경찰이 냉동 오징어, 홍합, 상어 스테이크, 훈제장어도 가져다 줬다.
세르게이는 “이 곳에 코뮌(commune: 소공동체)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목적지를 모르는 배에 올라탄 승객들처럼 사람들은 절망과 희망을 말했다. 자신들의 삶을 뒤집은 불의에 화를 냈고 언제든 날아들 수 있는 폭탄을 두려워했다.
일부는 고양이와 개를 데려왔다. 극장 통로에서 패럿 젬피라를 보여주는 한 남성은 아이들 수백명의 인기를 끌었다. 어린이들이 극장 곳곳을 신나서 뛰어 다녔다. “아이들은 언제나 즐겁지요”라고 곤초로바가 말했다.
안나는 사람들이 침착하고 차분했다고 했다. 여분의 담요가 생기면 나누었다. “모두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다.
소련 시절인 1960년대에 지어진 극장 이름은 러시아드라마극장이다. 뒤에 마리우폴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인근에 있는 철강회사 2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스식 기둥이 있는 회반죽으로 마감한 건물이다. 극장에 면한 광장 쪽으로 희극과 비극에 사용하는 가면을 내걸었다. 770여 좌석이 있는 이곳에서 드라마, 코메디, 뮤지컬이 공연됐고 철강회사 기념행사, 항만노동자 행사, 마리우폴 국립대 졸업식이 열렸다.
러시아는 이 도시를 오래전부터 탐냈다. 2014년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반군이 잠시 점령한 적도 있다. 마리우폴은 러시아 국경에서 56km 가량 떨어진 아조프해 북쪽 해안도시여서 러시아가 8년전 합병한 크름반도로 가는 길목이다.
극장은 도시의 정체성을 지켜온 상징이었다. 2015년 시당국이 극장 이름에서 러시아라는 단어를 삭제했고 지난해 7월엔 러시아어 공연을 금지했다. 마리우폴은 러시아어 사용지역인데도 그랬다. 극장 관객이 줄어들었다.
극장에 갇혀 있는 사람들 일부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잔인함을 비난한다. 마리우폴 시당국에 항복해 남아 있는 주민과 건물을 지키라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포위가 시작된 지 2주가 지나면서 극장에 머무는 사람들이 1500명으로 늘었다. 러시아군이 극장에서 몇 블럭 떨어진 산부인과 병원을 폭격한 지난 9일 에브게니야는 더 이상 사람들을 받아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구호대가 임산부를 극장으로 데려왔고 에브게니야가 자리를 마련했다.
극장 밖 길거리엔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다. 사람들이 일부를 수퍼마켓 카트로 옮겨 급히 만든 무덤에 파묻었다. 쓰러진 곳에 그대로 방치된 사람들은 담요나 비닐로 덮여 있다.
마리우폴에 대한 공급선이 차단되면서 식량이 부족해졌다. 세르게이가 찾아 오는 식품이 갈수록 모자랐고 에브게니야가 배급을 시작했다.
야밤에 러시아 전투기 소리가 하늘을 찢었고 창문 틈새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른 아침 날이 밝기 전 사람들이 전투기가 낮게 날면서 비유도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봤다.
가까운 곳이 폭격을 당했다. 미사일인지 폭탄인지 모를 것이 극장에서 100m 떨어진 아파트를 타격했다. 더 가까운 곳에 폭탄이 떨어지자 안나와 친구 빅토리아가 1층에서 무대 뒤로 자리를 옮겼다. 빅토리아는 “나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다”고 했다.
밤이되자 극장 벽이 폭발에 흔들렸다. 여러 명이 윗층에서 탈출해 지하로 몰려들었다. 너무 많아서 깔려죽거나 질식할 지경이었다.
전기기사 샤샤는 “극장도 더이상 안전하지 않지만 안전한 장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했다.
에브게니야를 비롯한 운영진이 어린이 수백명을 보호할 방법을 연구했다. 극장 창고에서 자원자들이 다음 공연용으로 구매했던 흰색 페인트를 가져왔다. 롤러로 극장 앞 뒤에 커다랗게 흰 글씨로 “어린이들”이라고 썼다. 러시아 조종사가 보면 공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3월14일 공식 탈출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도시를 떠날 준비를 했다. 극장 앞에 자동차가 모여 들었고 인근 서쪽 베르디얀스크나 북쪽 자포리지아까지 1인당 최대 100달러를 지불했다.
빅토리아는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느꼈다”고 했다. 15일 아들과 안나와 함께 미니버스를 탔다. 극장에 남은 사람들이 1000명 아래로 줄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나우카가 말했다. “고양이같은 예지력이 없었다. 우리는 인도지원 탈출버스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16일 오전 11시가 막 지나 나우카가 오븐에 반죽을 넣었을 때 폭탄이 극장 지붕을 박살냈다. 나우카는 “눈깜박할 새 벌어졌다. 의식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수가 없었다. 위를 쳐다보니 온통 부서진 채였다”다고 했다.
부서진 극장 지붕이 무대로 내려앉았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부서진 목재와 철골이 반짝였다.
“단 한 발이 지붕을 뚫고 들어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고 세르게이가 말했다.
생존자들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대기엔 폭발로 생긴 파편 먼지와 연기로 가득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콘크리트를 들이마시는 듯했다”고 곤초로바가 말했다.
피투성이가 되서 어쩔줄 모르고, 귀가 먹고 뇌진탕이 걸린 수많은 생존자들이 마리우폴을 떠났다. 걸어서 서쪽으로, 북쪽으로 향했다. 러시아는 극장을 폭격한 사실을 부인하면서 우크라이나군이 공격했다고 했다.
“이런 일을 왜 당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린 그저 마리우폴의 평범한 시민들이다”라고 올하가 말했다.
폭격 희생자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주일 동안 수색을 진행한 시당국이 300명 이상이 숨졌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30일 마리우폴 주변에서 휴전을 발표하고 아직 시내에 잡혀있는 사람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약속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