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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정연욱]벼랑 위에 선 ‘윤석열의 시간’

입력 | 2022-04-02 03:00:00

尹, 정권심판 민심에 기댄 ‘기획상품’
허니문 없는 새로운 길 열어 나가야



정연욱 논설위원


문재인 정권 법무부 장관을 지낸 추미애의 진단에 별로 동의한 적은 없지만 단 하나엔 고개를 끄덕였다. “윤석열은 야당이 키운 기획 상품이다.”

보수우파 진영은 이미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박근혜 탄핵에 이은 ‘적폐 청산’ 드라이브에 이해찬이 주창한 ‘진보정권 20년’이 빈말로 들리지 않았다. 행정부와 중앙·지방의회까지 장악한 여권의 철옹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돈키호테의 무모함으로 비칠 만했다. 특단의 기획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 절박감이 커졌다.

첫 기획 상품은 ‘30대 0선(選)’ 당 대표였다. 50대 이상 중진급이 도맡던 당의 간판을 바꾸는 파격이었다. 70대 국민의힘 진성당원의 절규는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이준석을 어떻게 알겠나.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야 대선을 해볼 수 있는 것 아니겠나.”

30년 가까이 검사만 했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제1야당의 대선 후보가 된 것은 두 번째 기획 상품이었다. 문재인 정권이 쳐놓은 탄핵 프레임을 깰 수 있고, 그러면서 문 정권과 맞섰던 인물, 그래서 정권 심판의 깃발을 들 수 있는 인물이라면 정치 초보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윤 당선인의 능력보다는 정권 교체를 바라는 민의가 윤 당선인을 전장(戰場)의 도구로 불러낸 것이다. 윤 당선인이 대선 유세 때 “국민이 나를 불러냈다”고 한 것도 괜히 나온 말이 아닐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의 최병천 전 부원장은 3·9대선을 이렇게 복기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윤석열은 정치 초보다. 평생 검사로 살았던 사람이다. 윤석열은 대선 캠페인 기간 내내, 자기 지지층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 1987년 대선 이후 보수정당 계열 대선 후보 중에서 윤석열만큼 약체였던 후보는 없었다. 후보 경쟁력 관점에서도, 캠페인 관점에서도 그랬다. … 2012년 박근혜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처럼 ‘중도 확장’의 감흥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윤석열에게 졌다.”

정권 심판의 밑자락을 깔아 준 문재인 정권의 오만과 독선을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다. 이제부턴 오롯이 윤 당선인의 시간이다.

특정한 목적에 최적화된 기획 상품과 꾸준히 잘 팔리는 상품의 길은 같을 수 없다. 윤 당선인은 친문, 친박처럼 든든한 지지 세력이 뒷받침하는 ‘팬덤 정치’를 기대할 순 없다. 야당을 떠났던 2030세대가 윤 당선인을 밀었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스윙 보터라고 봐야 한다. 윤 당선인의 지지 기반은 다져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져가야 하는 상태라고 봐야 한다. 지난 대선이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었던 탓도 있겠지만 일단 지켜보자는 경계 심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지지가 역대 새 정부 출범 때와 달리 압도적이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이 때문인지 정권 교체기 신구(新舊) 권력이 사사건건 정면충돌하고 있는 초유의 상황이다. 적어도 정권 출범 후 몇 달 정도는 새 정부의 연착륙을 격려하는 허니문 효과는 아예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에는 이랬다는 관성과 타성에 젖어 있을 때는 더더욱 아니다. 대선 직후 예정된 전국 단위 선거는 대선 승리의 컨벤션 효과 덕분에 대부분 승리한다는 경험칙도 지워버려야 한다.

윤 당선인은 해묵은 과거와 단호히 선을 긋는 기획 상품을 찾았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 달 정도 지나면 떠나는 정권 탓을 하며 허송세월을 할 때가 아니다. ‘윤석열의 시간’은 벼랑 위에 섰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