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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해도 공부-번역… 내 지식, 이젠 낡았지만 평생 근학 권합니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입력 | 2022-04-02 03:00:00

[이런 인생 2막]中 고전 번역출간한 前 교사 진기환씨
농부집안서 태어나 교사로 외길… 가르치면서도 방송대 등서 학업 병행
시시콜콜한 개인 생활사 기록 습관… 퇴직 후엔 中고전 번역 몰두
현재 81권 펴내 목표 넘겼지만… 교사는 공부의 끈 놓으면 안돼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 언제나 긍정의 마인드로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살아온 진기환 전 교장.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배우며 살았고 살아보니 늙었지만 죽을 때까지 배움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근학(勤學·부지런히 공부하여 학문에 힘씀)은 교직자였던 진기환 씨(75·사진)가 평생 추구해 온 가치다. 1953년 전쟁 중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70년간 이어온 공부 기록을 담은 자서전 ‘도연근학칠십년(陶硯勤學七十年)’을 최근 냈다. 도연(陶硯)은 도연명의 이름에서 따온 아호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34년간 역사 교사에 이어 교장까지 지낸 뒤 2009년 2월 정년퇴직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14년간 배우고 42년간 가르치며 머물렀던 학교를 이때 처음 떠났다. 하지만 삶은 별반 달라질 게 없었다. 중국 고전 번역이라는 평생 과업이 눈앞에 있었다. 재직 중 중국 고전 역서를 15권 출간했고 퇴직할 때 인생 목표를 ‘내 키만큼 내 책을(等身書)’ 펴내는 것으로 삼았다. 그리고 정년퇴직 후 13년 만에 자신의 키(170cm)를 훌쩍 넘는 37종 81권을 출간해 인생 목표를 달성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 책은 ‘도연 진기환은 열심히 살았다’는 기록”이라며 “이름 없는 민중의 기록에 불과하지만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삶은 없다”고 썼다.


○운명과의 타협, 끊임없는 개선 모색
충남 홍성에서 넉넉지 않은 농부 집안의 6남 2녀 중 장남. 늘 그를 따라다닌 이 현실은 진로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가정 형편 때문에 원하던 약대나 화학 전공 대신 2년제 교대에 가기로 타협했다. 고교 2학년 때부터 실험실 조수로 일하며 화학에 빠져들었던 그였지만 “동생들도 중학교까지는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아버지로서는 농사일에서 2년이나 빼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때가 1965년인데, 전교에서 날고 기던 아이들도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5급 을류’(현재의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시절이었어요. 원망은 없었지만 진로를 갑자기 전환하다 보니 혼란스러웠습니다. 교대에서 뭘 배우는지도 전혀 몰라 입학 뒤에도 애를 먹었지요.”

그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했지만 가능하다면 자신의 노력으로 조금이라도 개선하려 애썼다.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된 지 1년 만에 군에 입대했고 제대 뒤 2년 만에 중고교 교사가 되기 위한 준교사 고시검정에 합격해 고등학교 역사 교사로 부임했다. 그 몇 년 뒤인 1975년에는 서울 순위고사에 합격해 대동상업고등학교(현 대동세무고등학교)에 부임해 정년퇴직까지 봉직했다.

○모수자천

진기환 씨가 ‘내 키만큼 내 책을’ 펴낸다는 목표를 달성한 것을 기념해 자신이 번역한 책 81권을 쌓아놓고 포즈를 취했다. 자택에서 올해 초 아들이 찍어줬다고 한다. 진기환 씨 제공

‘모수자천(毛遂自薦)’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우화다. 전국시대 조나라 평원군에게 식객 모수가 사신의 일행으로 끼워 달라고 자신을 천거했고, 남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정작 큰일을 해냈다는 일화다. 진 씨가 자신을 취재해 달라며 보내온 메일 제목이 모수자천이었다.

막 나왔다는 자서전을 받아 뒤적이는 사이 뭔가 숙연한 기분이 든다. 학창 시절 성적표에서부터 그가 낸 책들의 머리말까지, 정직하고도 시시콜콜한 기록이 빼곡한 책갈피에서 한 인생의 무게가 오롯이 전해져 왔다. 행간에 숨어 있을 사연들도 헤아려졌다. 예컨대 결혼 이후 1987년 현재의 25평 아파트에 안착하기까지 조금씩 넓혀가며 이사 다닌 집의 주소와 평수, 가격이 기록돼 있다. 초중고교 생활기록부나 성적표까지 실물이 나온다. 자서전 앞부분에는 10년마다 찍은 그의 증명사진들이 실렸다. 고3 때, 군대 제대 말년, 결혼식 직후….

“저는 역사 선생입니다. 역사는 기록이죠.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으로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을 남기는 습관은 이어졌다. 교장으로 재직한 5년간 근무일지를 작성해 3권의 책으로 제본했다. 아들 결혼에 ‘혼사기’를 썼고, 자신의 여행 기록을 ‘도연유기(陶硯遊記)’로 남겼다. 손자가 태어난 이후부터 시작한 ‘조손일기’를 16년째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의 자서전에서 눈에 확 띈 대목이 있다. ‘내 낡은 지식, 이제는 쓰레기’라는 글이었다. ‘내 책은 이제 한 시대의 슬픈 잔영이다. 내 책은 곧 도서관 수장고 속에 처박히거나 고물상에 폐지로 팔려 파쇄기에 들어갈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요.

“세상은 새로운 것들로 넘쳐나고 학문도 그렇습니다. 제 작업은 주제도, 책 쓰는 방법도 옛날식이고 주로 옛날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내 책을 읽지요. 지식에도 수명이란 게 있는 법인데 제 시대는 이제 저문 것이죠. 책을 군말 없이 내주는 출판사도 고맙긴 하지만 가끔 답답하기도 합니다.”

동양 고전 전문 출판사인 명문당은 1990년 그의 첫 책 유림외사 3권을 내준 이래 지금까지 그의 책 70% 이상을 출간해줬다. 그는 자신의 책은 찍을수록 손해일 거라고 보고 있다.

―쓰레기가 될 거라 생각하면서도 굳이 애써 작업하는 심경은 어떤 걸까요.

“서글프죠. 몇 년 전부터 느꼈어요. 인공지능(AI)에 대한 신문 칼럼을 전혀 이해를 못 하겠더군요. 이미 나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데도 장애를 느끼는구나. 내 지식은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구나…. 애써 일한 것들이 쓰레기가 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거니까. 어쩔 수 없지요.”


○ 내 70년 공부는 뭐였을까…그래도 열심히 했으니 족하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 언제나 긍정의 마인드로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살아온 진기환 전 교장.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그는 가르치는 데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려 했다. 재직 중에 국역연수원(현 한국고전번역원)과 방송통신대 중국어과, 교원대 대학원에서 도합 10년간 학업을 병행했다. 어려운 주머니 사정 때문에 학비 없이 공부할 길을 찾아다닌 결과였다. 교사 월급으로 집을 장만하고 아들 둘을 키우고 동생들 학비도 일부 지원해야 했다.

어쩌면 퇴직 후는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기였다.

“연금이 있고 자식들도 장성했으니 돈 쓸 일도 사라졌죠. 하지만 저는 62세 퇴직 이후 공부와 번역을 쉰 날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배움은 그만둘 수 없어요.”

지금까지 펴낸 번역서들은 중국의 문사철(文史哲)에 집중됐다. 예컨대 역사서로는 정사 한서(漢書·전 15권), 후한서(전 10권), 정사 삼국지(전 6권), 십팔사략(전 3권) 등이, 문학으로는 당시대관(唐詩大觀·전 7권), 당시 300수(전 3권) 등이, 철학서로는 공자가어(전 2권), 안씨가훈(전 2권), 논어명언 300선 등이 있다. ‘국내 최초 번역서’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이 적지 않다.

―앞으로 계획은….

“지금 ‘수당(隋唐)연의’라는 청나라 때 소설을 번역 중인데 500∼600쪽 5, 6권 분량입니다. 이걸 마지막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퇴직한 뒤 10여 년, 남보다 적게 일하지 않았고,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로 아쉬운 게 없어요.”

―100세 시대인데, 앞으로 20여 년은 더 사셔야 할 텐데요.

“공자는 73세, 맹자는 84세에 돌아가셨으니 당시에 대단히 장수한 겁니다. 전 올해 우리 나이로 76세이니 공자님보다 더 살았어요. 평생 나름대로 근학했으니 언제 염라대왕을 만난다 해도 후회는 없습니다. 맹자처럼 84세까지 산다면 좋겠지만, 글쎄요. 제 건강이 그렇게 될지 모르겠네요.”


○ ‘평생 근학’을 권함
그가 취재를 원한 이유는 우리나라 교사들에게 ‘학문을 해야 한다, 적어도 공부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전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흐르지 않는 물은 곧 썩고 칼은 갈지 않으면 녹이 슬죠. 교사가 공부하지 않으면 교사의 본분을 다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일군 것들이 헛된 것으로 돌아갈 운명임을 잘 알고 있는 그가, 그럼에도 후배들에게 평생 근학을 권하고 있다. 결국 이게 인생 아닐까.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