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sight] Interview
박해윤 기자 land6@donga.com
강의실 대신 명동 증권사 찾던 대학생
고려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1970년대 후반 대학생 박현주는 서울 명동 거리를 자주 드나들었다. 대학교 경영학과 강의실 수업은 따분하고 지루했다. 대신 어머니가 준 용돈으로 주식투자를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명동 증권사 객장을 찾아다니면서 실전 투자를 하는 게 강의실에서 듣는 교수님 수업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눈앞에서 돈이 왔다 갔다 하는 짜릿한 게임이었다. 투자한 기업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었다.
어느 하루 대학생 박현주는 ‘사자’ ‘팔자’로 정신이 없는 명동 객장을 뒤로 한채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학생! 거기 똑바로 서 봐”라며 박현주를 불러 세웠다.
회색 승려 옷을 입은 스님은 박현주를 명동 한복판에 세워놓고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곤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곤 홀연히 사라졌다.
“너는 앞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도록 해라.”
대학생 박현주가 강의실 대신 증권사 객장에서 주식 투자에 열 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름도 모르는 스님의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순간이 아니었나’ 하며 박현주는 당시를 기억한다.
대학생 때 꿈은 공인회계사
대학생 박현주의 꿈은 공인회계사(CPA)였다. 당시만 해도 경영학과에 다니면 CPA를 목표로 하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도 괜찮고, 수입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3년 동안 CPA 공부를 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회계학은 할 만했는데 상법 등 법 관련 과목은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회계학 외에 통계학 재무관리 인사관리 조직론 등에 더 흥미가 많았다. 요즘도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통계를 눈여겨본다. 통계청의 인구센서스 발표 자료를 보면서 한국의 미래상을 그려보곤 한다. 많은 것이 통계, 그러니까 수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에겐 늘 돈이 따라붙었다
고려대 재학 시절 하숙을 하던 박현주에게 하숙집 선배가 어느 날 툭 던진 말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현주야, 너 관상(觀相)을 봐줄 테니까 나중에 돈 벌면 나한테 10분의 1만 줘라. 너 얼굴 자세히 보니까 돈 아주 많이 벌겠는데?”
선배는 당시 주역(周易)에 푹 빠져 있던 사람이었다.
“네? 아이고, 무슨 말씀이세요? 나중에 취직해서 저 먹고살기 바쁠 텐데요 뭘.”
박 회장은 “돌이켜보면 내가 증권사에 취직하고 나아가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이라고 예언이라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고 회고했다.
박현주에겐 ‘투자의 귀재(鬼才)’라는 표현이 늘 따라붙는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는 얘기도 박현주에겐 수식어나 다름없다.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 입사한지 5년 만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을 달았고, 입사 10년 만에 강남본부장으로 전국 최연소 이사가 됐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아직도 이 기록을 깬 증권맨은 없다. 주식을 사고파는 매매 실적인 주식약정은 전국 1위에 항상 박현주라는 이름을 올릴 1990년대 중반 그는 잘나가던 증권사에 돌연 사표를 던졌다.
인생의 멘토였던 김재철 회장 만류에도…
39세 때였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지극히 아끼던 박현주의 사표를 한사코 만류했지만 그의 사표를 말릴 수 없었다.
“회장님, 지금 회사를 나가지 않으면 영영 봉급쟁이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흔이 되기 전에 창업해서 제 회사를 갖고 싶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평생 후회하면서 산다면 행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박현주는 당시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장 구재상(현 케이클라비스 대표)과 서초지점장이던 최현만(현 미래에셋증권 회장)과 함께 동반 사표를 냈다. 이들은 창업 동지이자 ‘박현주사단(師團)’으로 불렸다. 구재상은 운용의 베테랑이었고, 최현만은 관리의 달인(達人)이었다. 이렇게 3인방은 잘나가던 직장을 뿌리치고 힘을 합쳐 창업이라는 미지의 길로 들어섰다. 샐러리맨으로선 최고의 전성기에 창업을 택한 역(逆)발상이었다. 동원증권은 이들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1년 이상 퇴직금도 지급을 미루는 등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7명 직원 압구정에 투자자문사 차려
박해윤 기자 land6@donga.com
가장이 직장을 잃으면서 무너지는 가정도 잇따랐다. 주가가 폭락하고 아파트 값도 폭락했다. 부도난 대한민국의 현주소였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상징이던 대우그룹이 마침내 무너졌다. 당시만 해도 고금리 수익증권을 팔던 투자신탁회사의 부실은 곪을 대로 곪은 상황이었다. 모두 내 돈이 어떤지, 안정적인 투자처를 찾아야 했다.
이 모든 위기가 박현주에겐 오히려 기회였다. 투자의 패러다임을 바꿀 절호의 찬스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투자신탁회사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는 무렵 ‘투명한 자산운용’을 내걸고 뮤추얼펀드 돌풍을 일으켰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박현주펀드’를 선보였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증권사 객장에서 개미군단을 상대하던 그가 이제는 직접 투자가 아니라 간접 투자로 돌아설 때라고 역설했다.
박현주는 서울 조선호텔을 시작으로 부산 서면의 롯데호텔, 광주 파크호텔, 대전 유성호텔 등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면서 투자설명회에 직접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왜 지금 뮤추얼펀드인지, 내 돈을 누가 운용하는지 투자자들이 알아야 하는 펀드매니저 실명제 바람이 이때부터 불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길거리를 가다보면 돈이 발길에 툭 차일 정도로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투자의 패러다임이 급속히 바뀌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만큼 기회가 많았을 때였지요.”
조그만 자문사로 출발해 인터넷증권사로 시작한 미래에셋증권은 출범 17년 만인 2016년 여의도 자본시장의 부동(不動)의 1위이던 대우증권을 인수해 자본시장의 ‘메기’가 됐다.
터를 먼저 보는 박현주의 대체 투자
자본시장에서 박현주는 주식과 펀드의 대명사였다. 주식브로커로 출발한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주식 투자의 달인이었다. 개별 종목 투자의 위험이 커지면서 개인투자자들이 펀드로 갈아타야 한다면서 내놓은 것이 뮤추얼펀드 1호인 ‘박현주펀드’였다. 자산운용사 설립에 이어 SK생명 인수로 미래에셋생명을 만들고, 이어 대우증권을 인수했다. 미래에셋금융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면 증권 보험 자산운용 등 3대축으로 짜여 있다.
하지만 박현주가 부동산을 보는 눈은 매의 눈처럼 매섭다. 지금은 해외 부동산과 호텔에까지 투자하면서 포트폴리오 범위를 넓히고 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박현주 회장의 부동산 투자는 풍수(風水)학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풍수지리라는 것은 땅의 이치에 기반한다고 믿는다. 좋은 땅의 기운이 좋은 자리를 만들며, 같은 땅이라도 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곳은 좋은 터가 아니라고 한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풍수를 주술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가의 관점에서 보면 풍수는 과학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사옥 터를 잘못 정하는 바람에 낭패를 본 기업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죠. 비즈니스를 하면서 제 자신도 풍수에 대한 공부를 꽤 했습니다. 미래에셋 부동산의 역사도 여기서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뮤추얼펀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2000년 초반 박 회장은 미래에셋 사옥을 서울 여의도 옛 주택은행 본점 건너편의 한국유리 빌딩으로 정했다. 한국의 맨해튼 격인 여의도는 지기(地氣)가 센 탓에 대로변에 위치한 사옥들은 풍파가 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의도 국회를 바라보는 쪽에 들어선, 대로변에 위치한 많은 금융회사들이 부도가 나거나 문 닫는 사례가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미래에셋의 첫 사옥인 한국유리 건물은 대로변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앞서 미래에셋은 서울 강남의 삼성동에 있는 빌딩을 샀다가 서둘러 매각한 전력이 있었다. 박 회장이 보기엔 건물은 좋았지만 사무실용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미래에셋 본사 부지는 옛 주전소(鑄錢所)
지금 본사가 있는 서울 을지로의 미래에셋 센터원 빌딩은 청계천을 바라보는 입지로 과거 주전소(鑄錢所) 터였다. 청계천 공사가 진행될 무렵 매입한 이곳에 빌딩을 세우고 비즈니스를 한 이후 미래에셋의 사업은 번창 일로를 걸었다. 동전을 찍어내는, 다시 말해 돈을 만들어 내는 곳이었던 만큼 돈 벌기엔 딱 좋은 부지라고 한다. 물론 이 결정은 박 회장이 직접 내렸다. 박 회장은 당초 센터원 빌딩 36층에 있는 회장 사무실의 책상이 청와대를 마주 보는 쪽으로 배치된 것을 보고 청와대를 비껴 옆으로 좌석 배치를 바꾸었다고 한다.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전망으로선 좋을지 모르지만 강한 기운에 압도될 수 있어 피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
서울 광화문 포시즌호텔은 처음에 사옥 부지로 활용하려 했지만 박 회장이 호텔 부지로 바꾸었다. 입지상 오피스로 사용하기엔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래에셋의 사옥 입지를 결정할 때는 이처럼 창업주인 박 회장이 직접 현장을 둘러보고 난 후 여러 조언을 받아 최종적으로 이뤄졌다.
남해안을 나폴리 같은 아름다운 해양도시로
요즘 박 회장은 틈날 때마다 강원 홍천과 전남 여수 경도, 남해안과 동해안 등지를 둘러보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탐색하고 있다. 해안을 낀 곳에 새로운 해양 도시를 설계하는 꿈을 꾸곤 한다. 서울이 아닌 동해안이나 남해안 등지에 외국인학교나 국제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육 인프라를 지방으로 분산하면 자연스레 수도권 중심에서 벗어나 지방과의 균형 발전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여수에서 거제까지 남해안을 자동차로 드라이브하면 유럽의 어느 해변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마치 나폴리 같은 곳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죠. 이런 아름다운 천혜 관광자원을 잘만 개발하면 지역 주민들이 수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는 관광 수요도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요. 정부가 균형발전 지방분권 얘기만 할 게 아니라 잘 개발될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획기적으로 해야 합니다.”
아들과 두 딸 자신의 삶 개척해야
미래에셋은 올해 창립 사반세기를 맞았다.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로 창업한 지 어느덧 2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창업 당시 39세던 박 회장은 이젠 60대 중반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하는 대규모 기업집단 서열에 미래에셋그룹은 20위다. 재벌로 출발하지 않은 회사로 이처럼 고속 성장을 한 전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박 회장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미래에셋을 100년 기업으로 키워야 할 토대를 만들어놔야 하기 때문이다.
슬하에 두 딸과 아들 등 3남매를 둔 박 회장은 세습경영을 하지 않는다고 일찌감치 선언한 상태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세습을 하는 한국 재벌 오너 2세와 3세 등 후세를 보면서 이들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해 왔던 것이다. 두 딸과 아들에게는 주식을 물려주지만 경영에는 직접 간여하지 않도록 할 방침이다. 대신 1년에 두어 차례 열리는 이사회에 참석해 대주주로서 경영권 참여에 국한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재벌 경영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장점을 딴 ‘미래에셋식 경영’이다.
과감한 세대교체로 샐러리맨 신화 만들 것
많은 인재들이 서로 경쟁해 회사의 전문경영인이 되는 문호를 활짝 열어놓으면서도 전문경영인이 오래하는 폐단을 줄이기 위해 대표이사 정년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재벌 체제는 지양하면서도 재벌 총수가 물러나면 그를 보좌하던 중역들도 자연스레 물러나는 한국 재벌의 과감한 세대교체의 장점을 본받겠는다는 생각이다. 박 회장은 대표이사에 대해 정년제도를 도입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생각이다. 대표이사에 정년제를 도입하면 임원들도 자연스레 정년제에 해당할 것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정착될 것이라는 기대다.
지난해 말 박 회장은 과감한 세대교체 인사를 단행했다. 젊은 피가 자연스레 조직에 수혈됨으로써 미래에셋을 보다 젊게 가져가야 할 적기로 판단한 것이다. 미래에셋을 100년 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유능한 샐러리맨 출신들이 그룹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기회를 대외적으로 공표한 셈이다. 젊은 피들이 꾸준히 미래에셋을 노쇠하게 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100년 기업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박 회장의 경영철학이다. 이를 위해 박 회장을 비롯한 창업 세대들은 뒤로 서서히 물러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한국 기업과 금융회사에서 전문경영인 체제가 오히려 조직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역동성을 저해하는 경우가 적잖았습니다. 재벌 체제의 좋은 점은 따오고 전문경영인 시스템의 장점도 배합해 미래에셋만의 새로운 지배구조를 만들어 나갈 생각입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