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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청와대 안주인’의 옷값과 그 무게

입력 | 2022-04-03 12:00:00


뮤지컬 ‘엘리자벳’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1837~1898)를 다룬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선 옥주현 신영숙 김소현 같은 빼어난 배우들이 열연했다. 엘리자벳(애칭 씨씨)이 삼단 같은 머리에 눈꽃처럼 흰 드레스로 단장하고 등장하는 1막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이 치명적 미모가 어떤 의미인지는 황후의 꼭 닫힌 방문 앞에서 황제가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가 말해준다. “당신의 아름다움이 큰 도움이 돼. 나와 함께 헝가리에 가주오.”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 황후 엘리자베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이 바이에른 공주의 삶은 동화가 아니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홈페이지 캡처

● 황후의 미모는 황실의 자산
1848년 민족주의 바람에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다. 제국은 혼란스러웠지만 씨씨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환호했다. 정치적 갈등도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탄생으로 봉합될 수 있었다. 지금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엔 엘리자벳 관련 상품 천지다. 황후의 미모는 국가의 자산이었던 거다.

가장 화려하고, 경박하고, 관능적인 시대정신의 화신. ‘로코코의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가 눈 뜨고 제일 먼저 했던 걱정은 어떤 옷을 입을지 고르는 것이었다. 수십 벌 의상을 만들어 왕실의 침실을 찾는 의상가가 재상보다 큰 위력을 과시했다. 두 번째 걱정은 머리 모양이었다. 고도의 기술자가 커다란 머리핀과 고형 포마드로 머리카락을 수직으로 세운 ‘뻥머리’를 만들어선, 과일 정원 집 배 따위를 기분대로 쌓아 올리면 그게 또 왕비를 쫓아가려는 상류사회의 유행이 됐다.

마리 앙투아네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씨씨도 하루 세 시간씩 머리 손질에 공을 들였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은 머리 손질 고민에서 자유롭지 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와중에서 굳이 올림머리를 했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 그 여자의 이름으로 벌어진 사건은 그 여자의 죄
제국의 시대, 씨씨의 외모 가꾸기는 당연히 백성들 부담이었다. 뮤지컬 ‘엘리자벳’에는 가난한 여인들이 우유를 못 구했다며 “배가 고파 죽어가 아이들이”노래하는데 “황후께서 그럴 리가” “우유 목욕을!” 한다는 후렴이 깔린다. 태평성대 때는 자산이던 황후의 미모가 흉흉한 시절엔 혁명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말하지 않았다. 왕비가 목걸이를 샀다고 해서 나라가 뒤집힌 ‘목걸이 사기 사건’은 왕비와 무관한데도 엉뚱하게 민심이 돌아섰다. 왕비가 워낙 보석 좋아하고, 사치와 낭비가 심하고, 경박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 그 여자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사람들이 그 사건을 믿은 것은 그 여자의 역사적 죄과다.” 1920~30년대 유럽 최고의 작가였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1932년 ‘마리 앙트와네트,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이렇게 썼다(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의 옷값 논란을 빗대는 건 절대 아니다).
● “영부인 외교의전 예산 지원” 분명히 밝혔다

김정숙 여사의 의상들. 동아일보DB

미국 같은 선진국에선 대통령 가족의 옷은 물론 머리 손질까지 당연히 사비(私費)다. 최근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확인한 사실이다. 의상비, 식비, 사적 여행이나 파티, 소송 비용까지 전부 개인이 부담한다. 취임식 파티복은 박물관에 전시되므로 디자이너들이 서로 기증하겠다고 경쟁하지만 나머지는 아니다. 따라서 옷값이 논란이 될 이유가 없다.

청와대에선 김 여사의 의상비가 특수활동비(이것은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국가예산이다) 아닌 전부 사비였다고 연일 주장한다. 하지만 지난달 29일 청와대 신혜현 부대변인이 공식 브리핑에서 동시에 이렇게 밝혔음을 우리는 잠깐 잊고 있었다.

“국가간 정상회담, 국빈 해외방문 외빈초청행사 등 공식 활동 수행 시 국가원수 및 영부인으로서 외교활동을 위한 의전비용은 행사 부대비용으로 엄격한 외부절차에 따라 필요 최소한의 수준에서 예산을 일부 지원받는다. 순방 의전과 국제행사 등으로 지원받은 의상은 기증하거나 반납했다.”

그러니까 특활비는 아니지만 김 여사 옷에 지원된 예산이 분명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옷들은 모두 반납됐다는 것이다. 그 의문이 지난 주말 풀리게 됐다.
● 그 많은 옷들은 사지 않았다, 빌려 입었을 뿐
김 여사가 취임식 때 입은 정장을 만들었던 단골 디자이너 A의 딸이 청와대 6급 공무원으로 청와대에 근무하는 사실이 밝혀졌다(마치 최서원의 딸 정유라가 근무한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김 여사가 패션쇼를 보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면 A가 청와대로 가서 가봉해줬으며 옷들은 구입이 아니라 80만 원 정도를 받고 대여했다는 중앙일보 보도다.

이로써 모든 의문이 풀리는 듯하다. 탁현민은 “김 여사의 의상 구입에 쓰인 특활비는 한 푼도 없다”고 했다. 당연하다. 그 많은 옷들은 대여를 해서 입었고, 예산에서 지원받았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자. 대통령 해외순방 때 부인으로써 한번 입고 돌려줄 옷이면, 내 돈을 낼 수 있겠나? 없다. 국가 예산이어야 한다.

패션쇼를 보고 마음껏 골라 입는 ‘영부인의 공주 놀이’에 국가 예산이 들어갔다면, 엄혹한 코로나 시국에 청와대에선 우유 목욕을 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국민적 분노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문 정권은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에 불복해 대통령기록관에 봉인해둘 작정이었을지 모른다.


2018년 프랑스 파리 순방 당시 입었던 명품업체 샤넬에서 빌려 입었던 한글 디자인 의상. 오른쪽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영부인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 동아일보DB


● 대통령이 못하면 부인은 ‘여혐 희생자’ 된다
대통령 부인은 세련된 옷을 입을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왕실과 국가 재정이 분리되는 건 근대국가 성립 이후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대통령과 부인의 옷까지 국가 예산으로 댄다는 점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대통령 부인이 국내 디자이너의 옷을 세계에 알릴 필요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김 여사가 옷 욕심을 절제하지 못함으로써 국민 원성과 질투와 부부갈등을 유발한 것은 일종의 ‘권력 남용’이 아닐 수 없다.

루이 16세는 무능하되 선량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혐의 희생자’로 단죄됐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한 뒤에도 김건희 여사는… 조용히 있는 게 좋을 듯하다. 죽어도 활동을 해야겠다면, ‘성공한 대통령’ 평가를 받고난 다음이어야 한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