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는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향후 전쟁 행위부터 따지자며 ‘정치적 처리’를 주장했지만 중국 호주 폴란드 등은 형사처벌을 요구했다. 결국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범죄를 다루는 임시 국제전범재판소가 일본 도쿄와 독일 뉘른베르크에 설치돼 전범들을 단죄했다.
▷당시엔 전범을 다룰 근거법이 없어 사후 입법에 해당하는 도쿄헌장과 뉘른베르크헌장의 규정에 근거해 판결이 이뤄졌다. 대륙법계를 따르는 독일과 일본은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는 소급처벌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을 주도한 나라는 불문법의 전통을 가진 영미계였다. 이런 ‘승자의 재판’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2002년 로마규정에 따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립된 상설 조직이 국제형사재판소(ICC)다. 전쟁범죄 등을 저지른 개인을 기소하고 재판하는 곳인데, 최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ICC 법정에 세우려는 움직임이 거세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 외곽 도시 부차 등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증거가 드러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4일 푸틴을 ‘전범’으로 규정하며 재판에 회부하자고 주장했다. 미국은 40여 개 국가와 증거 수집을 하고 있다. ICC도 지난달 2일 우크라이나 내 민간인 사상자가 1400명을 넘어서자 123개 회원국 중 39개국의 요청에 따라 전쟁범죄 증거 수집에 들어갔다.
▷ICC가 ‘살아 있는 권력’을 기소한 사례는 수단 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와 리비아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 둘뿐이다. 그래서 푸틴이 실각할 때까지 길게 보자는 얘기가 나온다. ‘다르푸르 학살’의 주범 알바시르는 2009년 전범으로 기소되고도 10년간 권좌를 지켰지만 2019년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는 그를 ICC에 넘기기로 했다. 전쟁범죄엔 시효가 없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