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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박중현]영리병원

입력 | 2022-04-07 03:00:00


20년 전 김대중 정부는 각종 규제를 대폭 풀어주는 경제자유구역을 지정하고, 이곳에 외국인이 투자하는 ‘영리병원’의 설립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의료법은 의사 개인과 비영리 법인만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허용하는데 경제자유구역 등에는 해외자본이 50% 이상 투자해 수익을 내는 병원을 세울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인 등 외국인 환자, 해외 의료쇼핑을 다니는 한국의 고소득층이 이곳에서 돈을 쓰게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의사 단체의 반발에 부딪혔다.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공공 의료체계가 무너지고 서민 의료비 부담이 커진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반대 때문에 10년이 지난 뒤에야 세부 시행규칙이 정비되고 공식 명칭도 ‘투자개방형 병원’으로 바뀌었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한국 건강보험은 적용이 안 되지만 내국인을 치료하지 못한다는 규정은 없다”고 했다.

▷2017년 중국계 뤼디(綠地)그룹이 설립허가를 신청한 제주 서귀포시 녹지국제병원은 ‘국내 1호 영리병원’이 될 예정이었다. 지역 여론의 반대가 있었지만 제주도는 국제 관광지로서의 위상 등을 고려해 ‘외국인만 진료한다’는 조건을 걸어 승인했다. 원래 계획과 달리 한국인 환자를 못 받게 된 병원 측은 이런 제한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며 개원을 늦췄다. 석 달이 지나도 병원이 문을 열지 않자 제주도는 2019년 허가를 취소했다.

▷제주지방법원이 이달 5일 내국인 진료 제한 취소소송 1심 판결을 내놨는데 병원 측이 이겼다. “진료 대상을 제한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따로 제기된 병원 허가취소 무효화 소송도 올해 1월 병원이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다만 모든 소송을 병원 측이 이겨도 영리병원이 문을 열긴 어렵다. 이미 지분 대부분을 한국 기업에 팔았기 때문이다. ‘1호 영리병원’ 등장까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최초 작명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동네의원, 종합병원도 돈 버는 건 마찬가진데 ‘영리’라는 말 때문에 ‘의료를 돈벌이 수단으로 본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돈 많은 사람만 좋은 치료를 받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정서도 걸림돌이다.

▷대다수 선진국에선 값이 싸지만 서비스 수준이 낮은 공공의료와 별도로 비싼 비용을 내야 하지만 고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리병원이 공존한다. 병원에 대한 투자가 늘면 의사의 보수가 올라 낮은 건강보험 수가 때문에 나타나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 기피 현상을 줄일 수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의사와 자본이 연결되면 ‘아시아 의료허브’의 실현이나 고급 일자리 창출을 기대할 수 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문제가 아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