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체이스 ‘어린 고아’, 1884년.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푹신한 암체어에 편하게 앉아 있다. 배경도 의자도 모두 빨간색이라 강렬한 인상을 준다. 하얀 피부를 가진 소녀의 얼굴은 무표정하지만, 화면 밖을 응시하는 눈빛은 편안해 보인다. 도대체 이 소녀는 누굴까?
윌리엄 체이스는 19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이자 헌신적인 교육자였다. 뉴욕에서 수학한 후 독일 뮌헨에서 화가로 활동하며 첫 명성을 얻었다. 1878년 뉴욕으로 돌아와 유명 화가들이 모여 살던 10번가에 작업실을 차렸다. 그는 인물, 풍경, 정물, 파스텔, 수채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지만 명사들의 초상화로 이름을 날렸다. 당대 뉴욕의 주요 인사들이 그의 모델이 되었다. 한데 이 그림 속 모델은 예외적으로 보육원의 고아 소녀다.
당시 미국은 매우 젊은 나라여서 복지제도가 전무했다. 가난한 부모들이 공장이나 부두에서 하루 14시간씩 일하는 동안 아이들은 철저히 방치됐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수용소 개념의 보육원들이 생겨났다. 보육원 아이들 중 10∼20%만 실제 고아였고, 대부분은 가난 때문에 버려진 경우였다. 보육원 시설은 열악했고, 체벌과 폭력이 난무했다. 교육자였던 체이스는 이웃 보육원에서 발견한 이 소녀에게 동정심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고아의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이 그림은 완성된 1884년 봄에 ‘어린 고아’라는 직접적인 제목을 달고 미국 미술가협회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돼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화가는 그해 6월 벨기에에서 열린 ‘20인회’ 전시에 참여하면서 제목을 돌연 ‘느슨하게’로 바꿨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