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나이지리아의 한 대형 쓰레기처리장. 대형 덤프트럭이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구덩이 속으로 박스 수백 개를 쏟아부었다. 터져 버린 박스 속에는 코로나19 백신이 가득했다. 선진국에서 공여는 받았는데 유통기한이 지나 못 쓰게 된 100여만 회 분량이었다. 사람을 살린다는 백신들이 한순간에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는 장면은 씁쓸하고도 충격적이었다. 백신 접종률이 고작 5%대에도 못 미치는 저개발 국가로서는 더더욱 분통 터지는 매몰 현장이었을 것이다.
▷이유나 방식은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폐기되는 백신이 급증하고 있다. 현재까지 누적 폐기량이 233만 회를 넘어섰다. 1회당 대략 20달러로 계산하면 550억 원이 넘는 분량이다. 앞으로 폐기될 처지에 놓인 백신 예약 물량은 더 많다. 올해 국내에 도입될 분량은 1억2600만 회. 쌓여 있는 재고까지 합치면 1억4000만 회분이 넘는데 맞을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불과 7, 8개월여 전 백신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최소잔여형(LDS) 주사기를 구하고, 너도나도 접종 예약 ‘광클릭’을 해댔던 때와 비교하면 때 이른 격세지감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하기에는 변수도 적지 않았다. 치명률은 낮고 전파력은 높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팬데믹 국면을 바꿔 놓을 것으로 예상하기 어려웠다고 당국자들은 항변한다. 기존의 백신으로는 계속 진화하는 변이 바이러스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스라엘에서 최근 나온 연구에 따르면 60세 이상에 대한 4차 접종 효과는 불과 8주에 그친다. 백신 부작용 우려도 예상보다 컸다. 그 탓에 5∼11세 접종률은 0.7%에 머물고 있다.
▷국내에서는 처치 곤란 신세가 됐지만 그렇다고 백신의 가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전 세계에서는 백신 접종률이 20% 미만인 저개발국이 44개국에 이른다. 백신 저장 시설과 운송, 의료인력 부족 문제가 있긴 하지만, 공여 백신의 유통기한이 두 달 반 정도만 돼도 접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들 국가에 국내 예약 분량을 공여하는 방안을 찾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타이밍을 놓쳤다간 소중한 생명을 위해 백신을 나누는 일이 ‘쓸모없어지니 떠넘긴다’는 식으로 폄훼될지 모른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