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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팔리기 시작하자, 이 작가는 그림을 다 지워버렸다[영감 한 스푼]

입력 | 2022-04-09 11:00:00

타고난 재능을 평생
갈고 닦는 삶




마티스, 한 다발, 1954년. © Succession H. Matisse/Life and Joy



며칠 전 인생 첫 단편영화를 연출하게 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주변의 조언을 구했는데, 여러 사람의 의견대로 고치다보니 결국 내가 처음에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사라지고 이도저도 아닌 이야기가 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또 다른 작가는 자신이 추구하려는 예술은 뚜렷하지만 그것을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쉽고 재밌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유치하거나 뻔하지 않도록 고민하는 과정이 가장 어렵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제게 해준 적이 있습니다.

창작자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를 마주하게 되는데요. 만약 나의 직감과 타인의 의견이 맞다면 그 선택은 수월하겠지만, 그 두 가지가 상충한다면 많은 고민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무조건 너의 직감을 믿어라”거나 “사람들의 의견을 언제나 수용해야 한다”며 어느 한 쪽이 맞다고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조언을 해주고 있는 것이겠죠.

지난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앙리 마티스: 라이프 앤 조이’전을 보면서 저는 마티스가 이 ‘나의 직감’과 ‘타인의 인정’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평생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았던 과정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그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타고난 재능을 평생 갈고 닦는 삶앙리 마티스

1. 마티스는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주류였던 살롱 스타일의 미술을 배웠지만, 그것이 자신의 길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2. 그래서 살롱 스타일 미술을 가르쳤던 아카데미를 벗어나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작가와 작품을 보며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찾았다. 그 작가들은 프란시스코 고야, 폴 세잔, 반 고흐 등이다.

3. 마티스는 타인의 인정에 안주하지 않았다. 정물 다음엔 다른 장르, 그리고 판화와 드로잉, 가위로 오려낸 ‘컷 아웃’까지 평생 타고난 재능을 갈고 닦으며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늦깎이 미술학도가 된 법학도


앙리 마티스, 에칭(판화)하는 자화상, 1900-1903년. © Succession H. Matisse/Life and Joy




전시장에서 위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마티스가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지 10년 정도가 지나 막 이름을 알리기 직전의 작품인데요.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큰 손이 인상적이죠. 이 작품은 에칭 판화인데, 전시장에서는 이렇게 판화와 드로잉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 자화상이 그려질 무렵 마티스의 나이가 31-32세인데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지 10년 째가 이 나이이니, 마티스가 그림을 시작한 것이 20대 초반이죠. 마티스는 요즘의 미술대학과 같은 아카데미에 21세에 입학합니다. 당시 눈에 띄는 미술학도들은 이미 10대 때부터 그림을 그리며 기법을 충실히 익혔습니다.

마티스의 시작이 늦었던 이유는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장난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것을 좋아했다는 그는 불필요한 규칙을 따르는 것을 싫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에 대해 “뺨을 얻어맞는” 것과 같은 놀라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죠.

그러나 근면성실하게 자신의 사업을 일구어 중산층이 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마티스는 조언을 따라 법을 공부하고 변호사사무소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그 선택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마티스의 고향에서는 화가가 된다는 마티스를 ‘머저리’라고 조롱했다고도 하네요.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파리 아카데미에 입성한 마티스는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때 상대적으로 많은 나이와 부족한 기술 때문에 조급함을 느꼈습니다. 특히 “남들처럼 그리지 못한다”는 것이 괴로움을 느꼈다고 하는데요. 마티스는 파리에서 느꼈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치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다른 언어를 쓰는 것 같았다. 나는 군중에 끼어들 수 없었고 그들과 발맞춰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당시 아카데미 스타일 그림을 한 번 보겠습니다.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 순수, 1893년



네. 아마 지금도 이런 스타일의 그림이 ‘잘 그렸다’고 보이고 ‘좋다’고 느낄 분들이 있을 듯합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화’ 스타일의 그림이지요. 15~16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생겨난 소실점 원근법 중심의 르네상스 스타일 회화입니다. 사실은 아주 낡은 스타일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작가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는 당시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프랑스 화단의 권력자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부르주아 중산층과 미국인들이 인상파 스타일의 진보적인 그림을 좋아했다면, 사회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보수적인 권력은 이런 부그로 스타일의 그림을 옹호했답니다.

마티스가 아카데미에서 처음 그림을 배운 것도 바로 이 부그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스타일의 그림을 보며 마티스는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회의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던 중 마티스는 중요한 만남의 계기를 만듭니다. 바로 프랑스 릴의 미술관에서 ‘이 작가’의 작품을 보게 된 것입니다.

프란시스코 고야, 노인들, 1810년



앞에서 본 부그로의 그림과는 완전히 다르죠?

매끈매끈한 표면과 대비되는 거친 질감도 있지만, 더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그림의 내용입니다. 앞서 부그로의 그림은 ‘순수’라는 제목아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그렸는데요. 아마 작가가 생각한 순수라는 개념을 의인화해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순수’라는 그림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정말 순수하기만 한거야? 그 안에는 더 많은 다른 감정이 있을텐데.”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약간은 생각이 게으른, 전형적인 표현이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되는데요.

고야의 그림은 한 여인이 다른 여인에게 거울을 보여주고, 그 거울의 뒤에는 ‘어때?’라고 적혀 있습니다. 또 이 두 여인의 뒤로 낫을 든, 아마 시간을 의미하는 인물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죠. 인간의 나이와 시간,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그림이 흥미로운 것은, ‘이것은 순수야’라고 정해서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여러 구석 구석에서 이야깃거리를 던져주고, 보는 사람이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감상은 여러분의 몫으로 남기겠습니다.

마티스도 이런 고야의 그림을 보고 비슷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고야의 그림을 보고 그림이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나도 화가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하죠.

이 말은 살롱 스타일을 단순히 베껴야만 하는 일이 화가라면 자신이 없었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림을 ‘언어’로 사용해 이야기를 건네는 직업이 화가라면 그것은 내가 할 수 있겠다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마티스는 타인의 인정과 나의 직감 사이에서 한 번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타인의 인정이 살롱 스타일이라면, 그것을 따라가려고 노력도 해보고 의문도 가져보는 가운데 나의 직감과 맞는 다른 길(고야)이 있음을 찾아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는데, 다 지워버렸다

마티스는 이밖에도 아카데미 밖에서 수많은 타인들을 만나며, 그들의 작품에 스스로를 비추어보면서 자신만의 길을 갈고 닦아 나갑니다. 그 중에는 샤르댕도 있고, 폴 세잔, 반 고흐도 있으며 피카소를 비롯한 여러 동료 화가도 있었지요.

특히 1896년에는 브리타니를 방문했다가 호주 출신 화가 존 러셀을 만나 반 고흐의 작품에 대해 알게되고, 고흐의 드로잉을 선물로 받습니다. 1899년에는 세잔의 그림을 취급했던 독특한 화상 볼라르의 갤러리에서 세잔 드로잉을 발견하고 구입해 작업실에 걸어 놓기도 했고요. (마티스는 이 드로잉을 끝까지 간직하다 후일 미술관에 기증합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모색과 만남으로 마티스의 그림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합니다.

마티스, 테이블 위 접시들, 1900년 *비전시작품



이 변화의 과정 중에 있었던 흥미로운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마티스는 1904년 볼라르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이 무렵 마티스는 그림을 팔아서 번 돈으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데요. 이 시기는 마티스가 아직 아카데미 스타일을 시도하며 정물을 그리던 때였습니다. 볼라르의 개인전이 대성공은 아니었지만 그림 몇 점을 팔게 해주었고, 이 전시를 계기로 다른 갤러리스트가 찾아와 마티스의 정물 여러 점을 통째로 매입해갑니다.

그런데 이 때 마티스는 남아있는 아카데미 스타일의 정물을 모두 지워버립니다.

어느 날 정물 그림 하나를 완성했을 때였다. 이 그림은 이전 것만큼 좋았고, 나도 마음에 들었다. 이 그림을 내놓으면 내가 그렇게 필요했던 돈이 올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림을 갤러리에 넘기려는 유혹이 들었지만, 내가 만약 그 유혹에 넘어가면 그것은 나의 예술적 죽음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림을 없애려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정육점과 빵집에서 밀린 외상값을 내라고 손이 뻗쳐오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그림들을 없애버렸다. 그 날을 나는 나의 해방일로 부른다.



마티스, 디너 테이블, 1897년 *비전시작품


 
위 그림이 당시 마티스가 살롱 스타일을 따라 변주해 그린 것입니다. 앞서 ‘테이블 위 접시들’과는 색채도 다르고 구성도 좀 더 사진적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그림들을 지워버렸을 때 마티스는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에 있었습니다. 장인 장모가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던 사기 사건에 연루돼 경제생활을 할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마티스가 아내와 그 부모, 그리고 아이 3명을 모두 부양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마티스가 말한 ‘정육점과 빵집 외상값’은 이런 상황을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돈이 급한 상황이었지만 마티스는 이제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을 과감히 던져 버립니다. 새롭게 변화를 할 수 있고, 그것으로 다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책임감과 자신감이 없이는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이죠.

다만 캔버스 값을 아끼기 위해 마티스의 아내와 딸이 낡은 스타일의 정물화 그림에서 물감을 일일이 긁어내야 했다고 하네요. 마티스의 가족들은 그가 ‘참 지독한 예술가’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상황을 언제나 정직하게 보고, 근시안적인 유혹에 휘둘리지 않으며 타인과 나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찾아나간 마티스의 선택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 붓을 들기 어려워지자, 가위를 든 화가


마티스, 칼을 던지는 사람(아트북 ‘재즈’의 한 페이지), 1947년. © Succession H. Matisse/Life and Joy



전시장에서는 이렇게 평생 이뤄진 마티스의 다양한 시도 중 판화와 컷 아웃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부분 마티스가 40~50대 이상인 시기에 그린 것으로, 판화 작품은 인물 모델 그림이 많았습니다. 마티스의 회화 작품이 나오기 전 그가 대상을 두고 얼마나 다양한 시각으로 그것을 보았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마티스가 모델이 입고 있는 옷의 질감이나 실내 인테리어에 활용된 다양한 무늬를 예민하게 보고 그것을 집요하게 표현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마티스는 어릴 적 프랑스 보앵에서 자랐는데, 이곳은 태피스트리와 럭셔리 패션의 원단 생산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프랑스 북부와 네덜란드 지역에 살았던 플래미시가 많던 지역으로, 이들은 전통적으로 섬세한 표현으로 유명하죠. 이런 타고난, 또 성장하면서 옆에서 보고 듣고 자란 재능을 마티스는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고 갈고 닦으며 자신만의 목소리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작은 가게를 큰 도매상으로 키운 부모의 근면성실함을 그는 예술에서 유감 없이 발휘합니다.

전시장에서는 1942년 마티스가 출판사와 함께 만든 한정한 아트북 ‘재즈’를 볼 수 있는데요. 이 때 마티스는 암수술을 한 뒤 걸을 수 없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움직임이 어려워지니 그림도, 조각도 못하게 되자 그는 가위를 듭니다.

조수에게 종이 위에 물감을 칠하게 한 다음, 그 종이를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과감하게 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형태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며 마치 그림시를 지어내듯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그림들을 ‘컷 아웃’이라고 부릅니다.


마티스, 한 다발, 1954년. © Succession H. Matisse/Life and Joy



‘재즈’ 외에도 여러 권의 아트북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데요. 그가 84세로 사망하는 1954년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왕성한 작업 활동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가위를 들고 그렸던 ‘컷 아웃’은 절대 붓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어 선택한 차선책만은 아니었습니다. 마티스는 이 행위가 ‘조각과 비슷하다’고 느끼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털어놓는데요.

그가 고야를 통해 그림이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한 것 기억하시죠? 마티스는 ‘컷 아웃’을 마치 시인이 시를 짓듯, 형태를 이리 저리 배치해보면서 가능성을 시험하고 그것으로 화면 속에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마티스는 전체를 미리 구성한 것이 아니라, 여러 형태를 미리 잘라놓은 뒤 하나씩 배치해가며 그림을 구성해 나갔다고 합니다.

‘재즈’에는 마티스가 직접 손으로 쓴 글귀들도 담겨 있는데요. 그 가운데 마티스가 ‘미래의 삶은 누구나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평생 갈고 닦는 것이 된다면 좋겠다’는 취지로 남긴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마티스의 말년까지 이어진 열정은 결국 타인의 인정 속에서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만이 갖고 있는 무언가를 평생에 걸쳐 다듬으면서 세상에 없었던 가치로 만드는 기쁨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사람들은 과연 그런 삶을 살고 있을까? 혹시 나에게 맞지 않는 틀에 억지로 맞추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게도 됐습니다.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다는 걸 깨닫고, 더 멀리 보면서 ‘쉬운 길’로 유혹하는 그림을 모조리 긁어내버린 마티스의 선택도 되새기게 됐고요.

마티스가 예술가에 대해 한 말을 들려드리며 오늘의 영감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마티스가 말한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은 그것에 갇히지 말라는 것이지, 그 자체를 부정하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는 지금, 이 말은 예술가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예술가는 스스로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스타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명성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예술가는 성공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전시 정보
앙리 마티스: 라이프 앤 조이
2021.12.21~2022.04.10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작품수 200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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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