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속 잠자는 옷의 비율 ‘21%’ 옷에 담김 사연 적어 현장에서 교환 “가장 좋은 방법은 오래 입는 것”
날이 따뜻해졌습니다. 주변에 봄을 맞아 옷장 정리를 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가짓수는 많은데 입을 옷이 없다”고 한숨지었을 겁니다. 또 누군가는 지난 겨울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을 발견하고 “내가 옷이 이렇게 많았나”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수도 있죠. 그런데, 궁금합니다. 이렇게 옷은 멀쩡한데 입지 않는 옷은 얼마나 될까요?
다시입다 연구소가 여는 ‘21% 파티’에서 중고 의류를 고르는 참석자. 참석자들은 옷장에서 잠자던 옷을 이 파티에서 교환한다.
“21%입니다. 옷장 안에서 잠자고 있는 옷의 비율이요.”
● 패션 문외한, 의류 교환 파티를 열다
다시입다 연구소를 이끄는 사람은 3명입니다. 정 대표와 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정소연 디자이너, 웹진을 발행하는 최윤희 에디터입니다. 이들은 2019년까지만 해도 독립 잡지인 ‘언니네 마당’을 함께 만들던 사이입니다. 잡지 발행인을 맡았던 정 대표의 전공은 프랑스어. 그러고 보니, 세 사람 모두 패션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 이들이 의류 교환 파티를 시작하게 된 것은 ‘환경’이라는 키워드가 있어서였습니다.
‘다시입다 연구소’ 깃발을 든 정주연 대표. 옆에 있는 천 현수막은 자투리천으로 만들었다.
“세 명 다 환경 분야에 관심이 많았어요. 자연히 환경 분야 이야기를 많이 찾아 잡지에 실었죠. 그러다 당시 유럽에서 일고 있던 ‘숍스캄(K¤pskam)’ 운동에 눈길이 갔어요.”
‘숍스캄(K¤pskam)’은 스웨덴 말입니다. 영어로 풀이하면 ‘소비의 부끄러움(Shame of buying)’ 정도인데요. 당시 유럽에서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새 제품을 사지 말지 말자는 움직임이 퍼지고 있었는데, 이를 ‘숍스캄’이라 불렀다 합니다. 새 제품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자원이 소요되고 환경이 오염되니 대신 중고 제품을 쓰거나 고쳐서 계속 쓰자는 것이 이 흐름의 중심이었습니다. 정 대표는 “풍요롭게 자란 세대가 앞장서서 소비를 줄이기 위해 나설 정도로 환경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고 느꼈다”며 “이런 움직임을 소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생각하다 의류교환 파티를 열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 그 많은 옷들은 어디로 갈까
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물의 양들. 그만큼 오염시키는 물의 양도 상당하다.
의류 산업에 소요되는 물의 양은 전체 산업계가 사용하는 양의 약 20%에 달한다고 합니다. 목화밭에 물을 주고, 농약을 뿌린 뒤 다시 희석하고, 면화를 뽑아내 염색을 하는 등 가공하는 모든 과정에 물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면으로 된 셔츠 한 벌을 만들어내기까지 들어가는 물의 양은 2700L, 청바지 한 벌을 만드는 데는 7000L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플라스틱 제품에서 발생, 바다를 오염시키고 인간의 건강에도 위협이 되는 미세 플라스틱.
또 의류 산업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양은 전 세계 온실가스 산업 배출량의 8~10%를 차지합니다. 한 보고에 따르면 의류 산업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양은 2016년 기준 32억9000만 t으로, 2030년에는 40억1000만 t까지 늘어날 전망입니다. 중국 인도 등 인구가 많은 국가들의 경제 성장에 맞춰 의류 소비도 늘어나는 데다, 자주 디자인을 바꾸는 ‘패스트 패션’이 이를 부추기기 때문이죠. 이렇게 생산된 옷의 70% 이상은 3년 이내에 소각되거나 매립지 등으로 보내져 폐기됩니다.
어마어마하게 생산되는 옷들은 플라스틱 오염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의류의 약 63%가 플라스틱의 일종인 폴리에스테르와 같은 합성섬유로 만들어지는 상황. 새 옷은 세탁 과정에서 미세 플라스틱을 다량 배출합니다. 또 합성섬유는 땅에 묻어도 잘 썩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기 위해 스웨덴 출신 10대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지난해 중고 의류를 입고 패션잡지 화보를 촬영하기도 했죠. 정 대표는 “옷으로 인한 환경 문제는 결국 옷을 입는 모두가 실천해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 ‘옷의 소중함’ 전하는 의류 교환
‘21% 파티’에 나온 옷에는 모두 종이표가 붙어있다. 옷에 대한 간단한 소개글로, 옷에 대한 소중함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옷을 교환하기 전에 옷을 소개하는 문구를 짤막하게 써요. 이 옷은 어떻게 구했고, 몇 번 정도 입었으며, 왜 교환하게 됐는지…소장자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도 쓸 수 있어요.”
다시입다 연구소가 주최하는 ‘21% 파티’는 단순히 옷을 교환하는 행사가 아닙니다. 옷의 의미를 나누는 행사입니다. 참가자들은 교환에 앞서 옷에 담긴 이야기를 간결하게 적은 종이표를 옷마다 붙여야 합니다. 그리고 교환하러 내 놓은 옷의 수만큼 교환권을 얻어 다른 사람들의 옷을 둘러보고 교환합니다. 과거 여행지에서 산 옷, 면접을 위해 산 옷 등이 새 주인을 만나는 과정도 직접 볼 수 있죠. “이 과정에서 물건에 대한 소중함을 느꼈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서로 가져온 옷을 둘러보고 소개하며 교환할 수 있는 ‘21% 파티.
’21% 파티‘는 2020년부터 총 17차례 열렸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참석자 제한 등이 있어 SNS에 행사를 사전 고지해 참가 예약을 받아 진행했다고 하네요. 그렇게 다녀간 인원은 1200여 명, 이들이 가져온 의류는 3200여 점입니다. 그 중 2000여 점의 의류가 새 주인을 찾았고, 나머지는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가치 있는 소비를 중시하는 MZ세대, 그 중에서도 여성들이 주로 찾는다고 합니다. 정 대표는 “간혹 남자 참가자들은 교환할 옷이 없어 당황하는 경우가 있는데, 누군가 남자 옷을 잔뜩 기부해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21% 파티에서는 수선 체험도 진행합니다. 파티장 한 편에 재봉틀을 놓고 참가자가 직접 재봉틀을 움직여보는 것인데요. “재봉틀을 만져보지 못한 사람이 많아요. 근데 그렇게 어렵지 않거든요. 교환한 옷의 길이를 줄이는 정도지만, 조금 더 나아가서 자투리 천으로 주머니도 만들다 보면 ’나만의 것‘을 만드는 재미가 있죠.” 물건을 쓰다가 나에게 맞지 않거나 흠집이 나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쳐 쓰고 바꿔 쓸 수 있다는 메시지는 덤입니다.
● 21% 파티, 전국으로 퍼진다
옷도 교환하고 길이를 줄이는 등 간단한 수선도 진행하는 21% 파티.
4월 18일부터 24일 사이에는 21% 파티가 전국 곳곳에서 열립니다. 경기 고양시, 울산시, 강원 춘천시, 제주도…장소도 포장재 없는 물건을 파는 제로웨이스트 가게나 중고 의류 판매점, 서점 등 다양합니다. 다시입다 연구소가 SNS를 통해 지원을 받고 10곳을 선정했습니다. 이 곳들엔 21% 파티를 직접 열 수 있게끔 매뉴얼과 파티장에서 쓰는 의류 교환권, 종이표 등을 무료로 나눈다고 합니다. 정 대표는 “어디서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입던 옷을 나누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스며든 옷을 받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경험을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행사 기획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의류 산업의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 목소리가 커지면서 최근에는 업계들도 변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페트병에서 나온 재생원료로 옷과 가방을 만들거나, 목화 재배 과정에서 농약을 사용하지 않아 수질 오염과 물 사용량을 줄인 ’유기농 면‘을 활용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식입니다.
21% 파티장 곳곳에는 의류 산업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정보를 담은 천 현수막을 곳곳에 걸어둔다.
이와 같은 흐름에 대해 정 대표는 “친환경 제품을 사는 것도 좋고, 재활용한 제품을 사는 것도 좋다”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한번 산 옷을 최대한 오래 입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세월이 가고 체형이 변하면 다른 사람과 옷을 바꿔 입어도 되고, 혹은 수선해서 더 예쁘게 만들어 입어도 돼요. 더 이상 옷을 버리지 않고, 오래 입고, 교환해 입는 문화가 퍼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