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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칼럼]‘대통령실 민관합동위’ 자칫하다간 또 하나의 지뢰밭 된다

입력 | 2022-04-11 03:00:00

민관합동위에 靑 정책실 기능 이전, 정책의결권 부여는 위험한 발상
이익상충 시비로 바람 잘 날 없을 것



천광암 논설실장


미국에서는 기업인의 입각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트럼프 정부의 경우 렉스 틸러슨 국무, 마크 에스퍼 국방, 스티븐 므누신 재무, 윌버 로스 상무, 베치 디보스 교육장관이 억만장자 오너거나 전문경영인 출신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한때 벤처캐피털을 운영했고, 오바마 행정부의 상무장관 페니 프리츠커는 하이엇호텔 창업자의 딸로 부동산투자회사를 경영했다. 골드만삭스처럼 재무장관을 3명이나 배출한 기업도 있다.

한국에서는 2003년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임명된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 정도가 눈에 띈다. 그런데 그의 발탁은 역설적이게도 기업인 고위공직 임용의 씨를 말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가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이 논란이 되면서 백지신탁제도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사청문회마저 ‘망신 주기’로 흐르는 일이 많아지면서 기업인이 아닌 민간 전문가들의 공직 진출도 바늘구멍이 돼가고 있다.

대통령실에 ‘민관합동위원회’를 만들어 정책 컨트롤타워로 삼겠다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구상에는 이런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 당선인의 구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수위가 기존 청와대 정책실의 기능을 민관합동위원회로 넘기고, 정책 결정권까지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인사청문회나 주식 백지신탁제를 우회해서 민간 전문가나 기업인들의 능력과 경험을 국정에 활용하는 모델인 셈이다. 인수위는 참고 사례로 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이 오바마 정부와 트럼프 정부에서 각각 인공지능에 관한 국가안보위원회(NSCAI) 의장, 국방 혁신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았던 사례를 살펴보는 중이라고 한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첨단산업 분야의 기술발전 속도를 감안할 때 민간의 창의력을 정부의 정책결정 메커니즘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책실 기능 이전’이나 ‘정책 의결권 부여’는 너무 나갔다.

지금까지 큰 문제 중 하나가 인사청문회도 거치지 않은 대통령 참모들이, 도덕성과 정책역량에 대해 혹독한 인사청문회 검증을 거친 각료들의 상전 노릇을 했다는 점이다. ‘소주성’ ‘탈원전’ 등 문재인 정부의 정책 참사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나마 청와대 참모들은 길든 짧든 정치나 공직 경험이 있어서 공직자로서 기본은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기업인들이나 민간 전문가는 다르다. 이들이 최고 권부(權府)인 대통령실에 상주하면서 정책 결정에 간여하게 되면 이해 상충과 자질 시비로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다. 윤 당선인에게는 청와대 이전에 이어 또 하나의 지뢰밭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에릭 슈밋 사례도 번지수가 틀렸다. 그가 의장을 맡았던 NSCAI는 백악관이 아니라 의회 주도로 출범한 기구다. 위원 15명 중 12명을 의회가 임명했다. 나머지 3명 중 2명은 국방장관, 1명은 상무장관이 임명했다. 국방 혁신자문위원회도 백악관이 아닌 국방부의 자문기구다. 1년에 겨우 4번 모인다. 대통령 집무실과 같은 건물에 민관합동위원회를 두고 수시로 토론을 한다는 윤 당선인의 구상과는 별로 접점이 없다. 더구나 슈밋 전 회장이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 간부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거나 구글 전현직 직원을 심어 영향력 확장을 꾀했다는 의혹이 최근 불거져 ‘역풍’이 부는 중이다.

제왕적 청와대를 탈피해 ‘작은 대통령실’로 가겠다는 윤 당선인의 방향 설정은 옳다. 하지만 대통령실이 모든 것을 틀어쥐고 가야 한다는 발상이 바뀌지 않으면 실장, 수석 두세 자리를 없애고 인원을 줄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책실이 없어진 빈자리에 민관합동위원회가 완장만 바꿔 차고 또 다른 ‘옥상옥’ 노릇을 하는 것은 훨씬 더 위험하다.

우리나라에는 행정기관이 민간에 자문을 하고 의견을 수렴한다는 취지로 만든 위원회가 작년 말 기준으로 622개에 이른다. 이 중 71개 위원회는 1년간 단 한 번도 회의를 하지 않았다. 민간을 책임회피용 들러리로 보는 것이다. 심지어 ‘헌법상’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민경제자문회의조차도 지난 5년간 대통령 주재 회의가 5번 열린 게 고작이다. 설익은 아이디어인 데다 사회적 합의도 없는 대통령실 민관합동위원회에 ‘정책 결정’과 같은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보다는, 형해화한 이런 제도부터 제자리를 찾아 주는 것이 민간의 창의성을 생산적으로 살리는 길이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