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우리 군 핵심 전략 자산인 F-35A 스텔스기들이 활주로에 한꺼번에 도열하는 일명 ‘엘리펀트 워크’ 훈련을 하는 모습. 국방부 제공
신규진 기자
2020년 6월. 국방부는 ‘지능형 스마트부대’ 관련 보도자료를 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국방 분야의 혁신을 알리기 위한 이 자료는 23쪽 분량이었다. 내용도 꽤 상세했다.
그런데 이 한 문장 때문에 예상치 못한 촌극(寸劇)이 벌어졌다.
‘위성영상 7장(평양시내 10km²) 3차원(3D) 제작: 300시간→1.5시간’
그러나 군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기자들 질문이 ‘평양’ 문구가 담긴 이 문장에 집중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국자들은 이 사례를 보도에 다루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실무자 실수로 넣은 내용이라더니 아예 ‘평양시내’ 문구를 빼고 보도자료도 새로 배포했다. 당시 한 당국자는 이렇게 토로했다.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문구는 사실상 금기어”라고.
문재인 정부 임기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지금 굳이 옛 기억을 끄집어낸 이유는 그때와 사뭇 달라진 최근 군의 모습이 어색해서다. 지난달 24일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쏘자 군은 주력미사일 5발을 꺼내 들어 맞대응했다. 그다음 날엔 현 정부 들어 처음으로 F-35A 스텔스기 28대가 한꺼번에 활주로에 도열하는 ‘엘리펀트 워크(Elephant Walk·코끼리 행진)’ 훈련까지 실시한 뒤 ‘웅장한’ 모습을 공개했다. 그간 군은 F-35A의 출고식은 물론이고 연합훈련 참가 사실조차 쉬쉬해왔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북한이 레드라인(금지선)을 넘어서 사전에 계획한 대응을 한 것”이라고만 했다. 그럼에도 발 빠른 대응에 나선 군을 두고 뒷말이 무성했다. “지금까지 뭐 하다가…”라는 자조와 “이제야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나왔다.
이런 군의 변화를 두고 ‘뒷북 조치’라는 지적이 많다. 지나치게 정치적이라 불편하다는 시선도 있다. 국방부가 2월 말 느닷없이 육해공군 핵심 전력을 총망라한 6분짜리 영상을 공개했을 때도 그 진의를 두고 논란이 분분했다. 사실상 북한을 겨냥한 것들로, 전력화됐거나 개발이 진행 중인 무기들이었다. 이를 공개한 건 분명 이례적인 일로 “개발 중인 무기는 공개가 어렵다”던 기존 공보 준칙과도 어긋났다.
북한이 최근 4년 4개월 만에 핵실험·ICBM 발사 모라토리엄(유예) 조치까지 파기한 것을 현 정부의 ‘유약한’ 대북정책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엔 무리일 수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사석에서 “현 상황은 아쉽지만 대북정책 덕분에 임기 내내 북한의 우발적 행동을 방지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고 강변했다.
그럼에도 북한을 의식한 그간의 ‘로키(Low-Key)’ 행보가 군의 기본자세와 사기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는 건 다수의 군 관계자들도 동의하는 바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한다는 방침을 밝히자 현 청와대는 ‘안보 위기’를 내세웠다. 군 일각에선 실소(失笑)가 나왔다. 그간 일선 부대는 장병들이 땀 흘리는 훈련 사진 한 장조차 홍보하기 어려웠다. 연합훈련이 축소되는 등 ‘예외적 상황’이 일상이 되자 오히려 익숙해졌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이런 분위기를 만든 청와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안보 위기를 운운하자 적응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1일 이례적으로 북한 선제타격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이런 ‘강단’ 덕분에 1년 7개월 임기 중 처음으로 북한으로부터 “쓰레기” 등 말 폭탄을 얻어맞았다. 이렇게 당당한 장관의 발언을 두고 군 일각에선 “장관이 퇴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 슬며시 나왔다. 올해만 12차례 미사일 도발을 감행한 북한에 ‘해야 할’ 말을 한 장관에게 왜 이런 평가가 나올까. 군은 그 이유를 곱씹어 봐야 한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