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열 메드트로닉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사장 의료기술 분야 글로벌 선도기업… 아태지역 스타트업 지원 포문 열어 임상-상용화 등 단계별 전문인력… 혁신 아이디어 가진 기업에 솔루션 “국내 기술력은 이미 세계 최고 글로벌 수준의 정부 지원 필요”
이희열 메드트로닉 아태지역 총괄사장은 20개국, 1만여명의 직원들로 구성된 조직을 리드하는 메드트로닉 최고 경영진의 일원이다. 이 사장이 이끄는 아태지역은 메드트로닉에서 가장 실적이 좋은 지역 중 하나로 지속적인 성장과 높은 직원 만족도를 자랑한다. 메드트로닉 제공
이코노미스트 임팩트가 150명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헬스케어 스타트업과 중소기업 임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백서 ‘아태지역의 의료기술 생태계: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성공 강화’를 발표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55%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을 방해물이 아닌 기회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응답자의 80%는 ‘인재 채용’이 의료기술 스타트업의 중대한 해결 과제라고 꼽았으며 데이터 보안과 개인정보 관련 제도의 부재(80%)도 아태지역 전체에 걸쳐 ‘성장의 장애물’로 지적됐다.
한국의 의료기술 스타트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재 확보의 어려움, 데이터 보안과 개인정보 관련 제도의 부재에 공감했다. 단지 우리나라는 정부, 산업, 혁신 기술 회사들과의 파트너십 또는 협력에 더 크게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답변했다.
의료 기술 분야에서 글로벌 선도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메드트로닉이 최근 아태지역 헬스케어 스타트업에 솔루션 개발과 상용화 기회를 제공하는 ‘메드트로닉 아태지역 혁신 챌린지’를 개최했다. 46개국 323개 회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인 가운데 한국 기업을 포함해 최종 5개 스타트업이 선정됐다. 메드트로닉 아태지역 총괄사장이자 챌린지의 심사를 맡았던 이희열 총괄사장을 만나 한국 의료기술 산업의 현주소와 향후 성장을 위한 조건을 들어봤다.
이번 챌린지의 모태가 된 콘퍼런스가 있다. 2018년 메드트로닉이 오픈 이노베이션을 주도하기 위해 한국에서 KOTRA와 함께 개최했던 ‘메드트로닉 아시아 혁신 콘퍼런스’가 그것이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들에 업계 1위인 메드트로닉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몇백 개에 달하는 국내 기업들을 초청했다. 그중 몇몇 회사와는 실제로 비즈니스가 성사되기도 했다. 메드트로닉이 라이선스를 받아 해외에 판매를 해주는 회사도 있고 함께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협의 중인 회사도 있다. 이때 축적된 좋은 경험이 MAIC의 초석이 됐다. 이번에는 메드트로닉 아태지역 본부가 있는 싱가포르에서 개최했고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의료기술 회사에 기회를 열었다.
―진행 결과는 어떠했나.
메드트로닉은 전문가와 함께 25개 회사를 선정한 후 자사의 기술과 솔루션을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 기회를 제공했다. 그렇게 선발된 상위 10개 기업에 비즈니스 개발과 멘토십을 제공했다. 최종 비즈니스 사례 평가를 거쳐 5개 회사를 최종 우승 기업으로 선정했다. 메디씽큐(MediThinQ)라는 한국 스타트업도 5개 최종 우승 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이번 챌린지에 참여한 323개 스타트업 중 한국 회사는 아쉽게도 4% 정도에 그쳤다. 아태지역 의료 산업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저조한 참가율이다.
이번에 최종 우승 기업이 선보인 기술과 솔루션을 보면서 메드트로닉이 만든다면 개발하는 데 약 7∼8년의 시간과 수천억 원의 비용이 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많은 과정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스타트업은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때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 집중하면 훨씬 짧은 시간과 적은 자원으로 좋은 결과를 선보일 수 있다. 아이디어는 어디서든지 나올 수 있고 혁신적인 제품은 기업의 규모와 상관없이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개발 후에 거쳐야 하는 임상과 허가, 급여 등재, 상용화 과정은 규모 있는 회사와 협업할 때 훨씬 효율적이다. 메드트로닉만 해도 단계별 마일스톤을 책임지는 부서가 있고 해당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축적한 전문 인력이 풍부하다. 의료기기의 경우 디자인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메드트로닉은 디자인을 전담하는 부서도 따로 있다. 제품 자체뿐만 아니라 상용화 전 과정에서 메드트로닉이 지원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광범위하다.
글로벌 의료 기술 선도기업으로서 업계에 협업의 생태계를 조성하고 싶은 바람도 있다. 메드트로닉이 오픈 이노베이션의 기회를 먼저 열었지만 이 같은 협업 노력을 업계 2위, 3위 기업들도 함께한다면 의료기술 업계 전반에 협업 시스템이 자리 잡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협업을 리스크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것 같다.
한 회사에서 개발부터 상용화, 판매까지 진행하면 좋겠지만 모든 것을 문제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축적된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런 노하우와 경험이 부족한 스타트업도 메드트로닉 같은 기업과 협력하면 이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제품을 출시할 수 있고 또 다른 회사와 협력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 이후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독자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길 것이다.
물론 협력에는 상호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 메드트로닉도 다양한 기술 기업들과 협력 기회를 논의한다. 대표적으로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관련 협업을 위해 구글과 같은 굴지의 IT기업과 여러 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우리 아이디어를 빼앗기면 어쩌나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비밀 유지 계약 체결 등 협력이 가능한 환경이 법적으로 잘 조성돼 있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를 협력의 파트너로서 신뢰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의료기술 시장 환경은 여타의 아태지역이나 글로벌 시장과 비교할 때 어떠한가.
전반적인 의료 환경은 우수하다. 그러나 산업적 관점에서는 아직도 발전할 여지가 크다. IT, 전자, 반도체 등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분야와 비교하면 헬스케어 산업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성장을 위해서는 신제품이 나와야 하는데 신약이나 신제품을 배출한 나라를 얘기할 때 한국은 거론되지 않는다. 이런 점이 안타깝다.
―의료기술 산업 성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리나라 기술력은 세계 시장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 시장에서 싸우려면 우리나라와 경쟁하는 해외 국가가 기업을 어떻게 지원해주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대표적으로 메드트로닉 아태지역 본부가 있는 싱가포르와 비교해볼 수 있다. 싱가포르는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좋은 기업과 인재를 유치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국가 지원도 적극적이다. 일례로 10년 전쯤 다국적 제약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공장 부지를 물색하던 중 싱가포르가 후보지에 올랐다. 여러 후보지 중 결국 싱가포르로 최종 결정했는데 이는 싱가포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해당 부지는 주변에 지하철역이 있어서 공장을 건설하려면 지하철역을 옮겨야 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공청회를 개최해 적극적으로 주민들을 설득했고 당시 회사는 필요한 서류만 준비하면 됐다. 이는 단적인 예지만 싱가포르 정부가 1000억 원의 시설 투자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얼마나 적극적인지 잘 보여준다.
한국이 바이오와 의료기술 산업을 선도할 수 있도록 과감한 정책을 펼쳤으면 좋겠다. 양질의 스타트업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학계, 기업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협력도 필요하다. 메드트로닉이 이번에 개최한 MAIC와 같은 챌린지가 협력에 물꼬를 텄으면 한다.
―오픈 이노베이션과 관련한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이번에 발표된 5개 최종 우승 기업에는 솔루션 상용화를 위한 최대 20만 달러 규모의 파일럿 기회를 제공한다. 파일럿 기회 안에는 다양한 방식의 협력이 포함돼 있다. 우승 기업이 희망한다면 메드트로닉이 보유한 연구 시설을 이용해 연구를 진행할 수도 있다. 싱가포르에 6월 개관을 목표로 공사 중인 ‘디지털 메드트로닉 혁신 센터’도 이용 가능할 것이다. 해당 시설은 상용 가능한 최신 기술을 육성할 수 있도록 체험형 교육과 협업 공간을 제공하는 아시아 최초이자 메드트로닉 최초의 인프라다. 이러한 협력의 경험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레 신뢰도 두터워지고 산업 내 협력의 환경이 조성되리라 생각한다.
홍은심 기자 hongeuns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