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반대 컸을 우경화 정책도 적극 추진 냉엄한 국제현실 속 이익 극대화 전략 절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한국 국회에서 11일 열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 연설은 썰렁했지만, 지난달 23일 일본 국회 연설은 회의실 두 곳을 터서 진행했는데도 일부 참석자는 자리가 없어 서서 들어야 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를 비롯해 외교 안보 주요 각료들은 일제히 맨 앞에서 연설을 경청했다. 일본은 우크라이나 지원액을 1억 달러에서 3억 달러로 늘리고 총리가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대(對)러시아 추가 제재를 발표하는 등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한 적극적 정책을 펴고 있다.
일본의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 동정심이 아니다. 일본 정부와 집권 자민당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유로 들어 안보력을 강화하고 외교 무대 활동 범위를 넓히려 한다. 과거 야당 등이 반대했을 법한 우경화 방향의 안보 정책들이 걸림돌 없이 착착 추진되고 있다.
일본에서 국방력 강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나왔던 ‘전수방위 원칙에 어긋난다’ ‘평화헌법에 위배된다’는 반론은 이제 기계적 균형의 명분으로조차 찾기 어렵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의 침공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일본의 방위비 증액을 ‘군사대국화 야욕’으로 우려하는 주장은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서방에서도 잘 들리지 않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탄도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도발도 일본 정부는 현실적 위협으로 본다. 일본은 핵무기가 없는 우크라이나의 현실을 생생히 본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안보 전략을 짜고 있다. 배타적경제수역(EEZ)에 거듭 북한 미사일이 떨어지면서 “언제까지 일본 앞바다가 북한의 무기 시험장이 돼야 하는가”라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도발 강화에 비례해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용인한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경제안전보장법은 일본이 나아가고자 하는 경제 안보 정책의 방향을 보여준다. 일본 최대 경제단체 경단련(經團連)이 “이번 기회에 정보 보안제도를 도입해 상대국의 신뢰를 이끌어 내자”고 내놓은 입장은 일본 정부의 속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은 자신들의 군사 및 경제 기밀 보호가 부실해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가 참여하는 기밀정보 동맹체 ‘파이브 아이스’에 끼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이런 일본에 경제안보법 같은 정책은 언젠가 관철했어야 할 숙원 과제였다. ‘우리도 정보를 잘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 언젠가는 미국의 명실상부한 기밀정보 동맹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게 일본의 전략이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