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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자의 사談진談]참혹한 우크라 전장의 ‘종군기자’가 된 민간위성들

입력 | 2022-04-13 03:00:00

지난달 16일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 민간인 거주지역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불타고 있다. 맥사테크놀로지 제공

홍진환 사진부 차장


40여 년 전 베트남 전쟁의 총성을 멈추게 한 결정적인 사진이 있다. ‘네이팜탄 소녀’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사진은 포연이 자욱한 마을을 등지고 벌거벗은 아이들이 공포에 질려 달리는 순간을 포착했다. 거칠게 찍힌 한 장의 흑백 사진은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전 세계인들에게 알렸다. 반전 여론에 불을 지폈고 마침내 전쟁이 종식됐다. 이 사진으로 1973년 퓰리처상을 받은 종군기자 닉 우트는 ‘사진 한 장의 힘이 어떠한 것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사진의 발명’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1839년 이후 사진은 전쟁 뉴스를 보도하는 주요 매체가 됐다.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등이 발생한 1930년대를 기점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직관적으로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사진 이미지는 시각정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인지프로세서에서 문자에 비해 상대적 우위를 점하게 됐다. 여기에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한다’는 사진의 기술적 속성이 강화되면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증유의 ‘신뢰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에서도 사진은 반박할 수 없는 ‘증거자료’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다만, 과거 전쟁에서는 종군기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 전시 상황을 알리는 유일한 창구였던 것에 비해, 이번에는 인공위성이 촬영한 사진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새로운 ‘전쟁의 목격자’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정부가 운용하는 군사·정찰 위성보다 민간 업체가 운영하는 상업위성의 활약이 돋보였다. 국내외 언론사들은 맥사테크놀로지와 플래닛랩스 등 미국의 민간위성 통신업체로부터 고해상도 위성사진을 제공받아 전쟁 정보를 투명하게 알리고 있다. 자연스레 러시아의 거짓 주장도 드러나게 됐다.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에 러시아 병력이 추가 배치되는 장면이 찍힌 위성사진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또 러시아가 벨라루스에 파견한 부대를 이용해 우크라이나 북쪽을 공격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결국 러시아는 ‘보란 듯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했다.

수도 키이우와 마리우폴 등의 주요 도시에서 교전이 벌어지면서 “민간인 시설은 공격하지 않는다”고 러시아 정부가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산부인과 병원과 아동 시설 등이 공격을 받아 민간인 피해가 속출했다. 심지어 민간인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인도적 통로’에도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통신 시설이 파괴돼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위성사진이 러시아군의 포격 장면을 정확하게 포착해냈다. 포탄을 맞은 건물에서는 불꽃이 일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생생히 잡혔다. 마치 전투 현장에서 가까운 언덕에 올라가서 찍은 듯한 현장감이 살아 있었다.

최근에는 수도 키이우 인근 소도시 부차에서 러시아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현장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제적 비난여론이 높아졌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일부러 민간인 시신을 도로 위에 가져다 놓았다며 자신들의 만행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NYT)는 부차 주민들이 찍은 사진, 동영상과 함께 인공위성 사진을 분석해 러시아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현재 우크라이나 상공에는 약 50개의 인공위성이 작동하고 있다. 언론 보도에서 자주 등장하는 위성사진은 대부분 맥사테크놀로지와 플래닛랩스 등 민간 위성통신 업체가 제공한 것이다. 맥사는 현재 80기의 위성을 확보하고 있다. 496∼770km 상공에서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맥사의 월드뷰 위성은 지표면에 있는 30cm 크기의 물체까지 구별할 수 있다.

미국 과학매체 스페이스뉴스와 인터뷰한 대니얼 재블론스키 맥사 최고경영자(CEO)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허위 정보가 퍼지는 일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이번 상황과 관련해 대중의 논의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정밀한 위성사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뉴스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 대중에게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다. 전쟁에 책임을 묻는 국제 여론이 커지는 등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종군기자가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 한 장이 반전여론에 촉매가 된 것처럼 인공위성이 찍은 사진이 비극적인 전쟁을 종식하는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


홍진환 사진부 차장 je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