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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도서관에서 보낸 한 시간[공간의 재발견/정성갑]

입력 | 2022-04-15 03:00:00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북촌에서 전시를 보고 삼청동 뒷길로 산책 코스를 잡았다. 다음 일정이 없는 한가로운 오후였다. 사방에서 꽃이 터지는 중이었고 공기 중에 봄기운이 가득했다. 좀 걷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핸드폰으로 체크할 일도 있어 잠시 앉고 싶었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이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카페지만 점심 때도 커피를 마신 터라 다른 곳을 찾고 싶었다. 별 생각 없이 길가에 있는 갤러리에 들어갔다. 또 무엇인가를 눈에 넣는다는 게 돌연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냥 햇볕을 향해 고개를 들고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인데 그걸 허락하는 공간이 별로 없었다. 상점과 공간이 넘쳤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역설.

그러다 정독도서관에 닿았다. 나직한 반가움에 이끌리듯 그곳으로 들어갔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고등학교 때 그곳에서 보낸 주말 추억이 오버랩 됐으니 추억도 한몫 한 셈이다. 이상하게 공부를 한 기억은 별로 없다.(실제로 공부는 안 한 것 같다) 친구들과 어울려 등나무 밑에서 도시락을 먹고 벤치를 등받이 삼아 고개를 끝까지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좋아라 한 순간도 되살아났다. 어느 날엔가 소설책을 읽으며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던 날도 떠올랐다. 구체적인 건 하나도 기억 안 나고 그 계절의 온기와 풍경 같은 추상적인 것들만 아스라했다.

그렇게 들어간 도서관 정원에서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리셉션이 없다는 것은 때로 얼마나 편하고 좋은 것인지. 돈을 낼 필요도, 신용카드를 꺼낼 필요도, 왜 왔는지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활짝 열린 문을 향해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영국에 본사가 있는 유명 매거진 ‘모노클’에서는 매년 살기 좋은 도시 리스트를 발표하는데 체크 리스트 항목에는 자전거 통근 편의성, 좋은 점심 식사 장소, 커피 한 잔 값, 생활비 등이 포함된다. 공공도서관도 주요 평가 항목 중 하나다.(정독도서관은 서울시립공공도서관으로 1977년 개관해 한결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한 도시에 공공도서관이 많지 않다는 건 돈이 없어도 환영 받는 곳이 많지 않다는 것과 같은 얘기. 알고 싶고, 성장하고 싶고,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한 둥지가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도 된다.

조급함이 몸에 배어 그곳에 겨우 한 시간 정도 머물렀다. 대신 눈을 자주 감았다. 눈두덩 안쪽으로 빛의 알갱이가 기분 좋게 꿈틀거렸다. 눈을 뜨면 하늘에 사뿐히 떠 있는 벚꽃과 목련이 보였다. 돗자리를 펴고 음악을 듣는 청춘도 있었고 갓난아기를 데리고 산책을 온 부부도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개운했다. 충분히 풍요로웠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