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硏, 시뮬레이션으로 밝혀
IBS 기후물리연구단의 고기후 모델 시뮬레이션과 화석 등 고고학 자료를 종합해 계산한 호모 사피엔스(왼쪽),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운데),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오른쪽)의 선호 서식지다. 음영 값이 옅을수록 서식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IBS 제공
호모 사피엔스가 약 30만 년 전 지구를 덮친 극한의 빙하기에 적응하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현생 인류로 진화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규명됐다. 호모 사피엔스 외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네안데르탈인),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하이델베르크인) 등 고대 인류도 기후가 요동칠 때마다 생존을 위해 이주를 감행하며 진화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초과학연구원(IBS) 기후물리연구단은 독일, 스위스 연구진과 함께 현재부터 과거 200만 년 전까지의 기후변화 시뮬레이션을 통해 기후변화와 인류 진화의 연관성을 규명해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14일 발표했다. 인류의 진화에 기후변화가 어떤 영향을 줬는지 명확히 규명하는 과학계의 오랜 난제를 국내 연구진이 풀어낸 것이다.
○ 기후와 식생, 고고학 등 총망라…슈퍼컴으로 200만 년 복원
고대 인류의 화석은 인류 기원 연구에 가장 직접적인 연구 대상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약 23만 년 전 화석, 잠비아에서 발견된 약 30만 년 전 화석 등을 통해 과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약 30만∼20만 년 전 출현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화석만으로 인류 진화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에는 근거가 충분치 않아 여전히 논란이다.
악셀 티머만 IBS 기후물리연구단장은 “지구 자전축은 기울기가 바뀔 뿐 아니라, 약 2만 년 주기로 자전축이 회전하는 세차운동이 일어나 지역에 따라 받는 태양열을 변화시킨다”며 “빙하기가 오거나 가장 큰 열대 강우대를 이동시켜 습하고 건조한 기후가 오게 한다”고 설명했다. 시뮬레이션에는 IBS의 슈퍼컴퓨터 ‘알레프’가 활용됐다. 꼬박 6개월 동안 500TB(테라바이트) 용량의 데이터를 만들어냈다.
연구단은 이렇게 생성한 기후 자료를 과거 식생, 화석, 고고학 자료와 결합했다. 과거 200만 년 동안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3200개 지점의 인류 화석과 고고학 표본을 포함해 인류 역사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편집본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초기 인류를 뜻하는 ‘호미닌’의 시대별 서식지를 추정하는 시공간 지도를 구축했다. 호미닌에는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를 비롯해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에르가스테르와 호모 하빌리스 등이 포함된다.
○ 고대 인류는 기후변화에 따라 이동하고 진화
분석 결과 고대 인류는 서로 다른 기후 환경을 선호했으며 모두 기후변화에 따라 이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만∼100만 년 전 초기 아프리카에 서식한 인류는 안정적인 기후 조건을 선호해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만 서식했지만 80만 년 전에 일어난 기후변화로 유럽과 동아시아 먼 지역까지 이주한 것으로 확인됐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교체하는 주기가 약 4만1000년으로 짧았는데 약 100만∼80만 년 전후를 기점으로 10만 년 주기로 바뀌면서 빙하기가 더 오래 지속됐고 기온도 더 많이 떨어졌다. 이에 따라 당시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는 빙하기로 종류가 다양해진 식량 자원을 섭취할 수 있도록 적응해야 했고, 이 같은 진화 덕분에 유럽과 동아시아의 먼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티머만 단장은 “유라시아와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의 종 분화 모두 거대한 기후변화(빙하기)에 의해 유전적 병목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전적 병목은 갑작스러운 환경변화로 집단 내 사람 수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집단 전체의 유전자도 일부만 남아 다양성이 감소하는 현상이다.
티머만 단장은 “이번 연구는 기후가 호미닌의 진화에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현재 인류가 지금의 우리일 수 있었던 것은 인류가 과거의 기후변화에 수천 년 이상 적응해 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서동준 동아사이언스 기자 bi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