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1000년’(민음사)은 세계화의 시계를 1492년이 아닌 1000년으로 되돌려놓은 책이다. 1492년은 역사학계가 유럽의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기준점으로 꼽는 해다. 그해 크리스토퍼스 콜럼버스는 스페인을 떠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책은 첫 장부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서사를 뒤집는다.
콜럼버스보다 약 490년 먼저 신대륙에 온 사람이 있었다. 노르웨이 바이킹 레이프 에리크손이다. 바이킹 전설에 따르면 레이프는 1000년경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도착했다. 노르웨이 고고학자 안네 스티네 잉스타드는 1960년대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섬 최북단에 있는 랑스 오 메도즈 일대를 발굴조사하며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밝혀냈다. 유적지에서 바이킹 시대 유물인 청동 옷핀을 발굴한 것. 외투의 목 부분을 채울 때 사용된 일자형 청동 핀은 10~11세기 노르웨이에서 제작된 형태와 일치했다.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최초의 탐험가가 아니었다.
미국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 발레리 한센은 서구 관점에서 쓰인 세계화의 역사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2015년 발표한 ‘실크로드 7개의 도시’(소와당)에서 유라시아로 연결된 실크로드 교류사를 조명한 그는 신간에서 서구 열강이 경쟁하듯 항로 개척에 뛰어든 15세기보다 약 500년 먼저 대륙간 교역이 일어난 사실에 주목한다. 1000년경 세계화 무대는 유럽이 아니라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이었다. 세계화는 유럽이 만들어낸 현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은 이미 정교한 무역망으로 연결돼 있었다. 1502년 콜럼버스의 아들 페르난도는 중앙아메리카 온두라스에서 북쪽으로 70㎞ 떨어진 과하나섬 인근에서 카누 한 척을 마주친 기록을 남겼다. 마야인 선원 25명이 몰던 배 위에는 채색된 의류와 목검, 흑요석 등이 가득 실려 있었다. 페르난도가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물건들”이라고 기록했을 정도.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에 있는 마야 문명 유적지 치첸이트사에서 90㎞ 떨어진 세리토스섬에서는 11세기에 제작된 터키석과 금 장신구 등이 출토되고 있다. 현대 고고학자들은 세리토스섬이 멕시코와 미국 남서부를 잇는 항구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마찬가지로 포르투갈 왕국의 엔히크 왕자가 15세기 서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하기 전부터 아프리카는 세계무역의 중심지였다. 아프리카의 여러 왕국들은 이슬람권으로 시장을 확장하기 위해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택할 정도로 무역을 중시했다. 15세기 전 유럽과 아시아로 흘러간 금의 3분의 2가량은 아프리카산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유럽으로 이어지는 항로뿐 아니라 중국과 연결되는 무역로가 이미 존재했다. 1000년경 세계 최대 무역도시는 중국 푸젠(福建)성 취안저우(泉州)에 있었다. 당시 취안저우는 프랑스 파리 인구(2만 명)의 50배에 달하는 거대 국제도시였다.
저자는 세계화 시계를 500년 앞당겼을 뿐 아니라 세계화의 진정한 주역을 모색한다. 서구 역사에서 세계화의 객체로 여겨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이 이 책에서는 주체로 다뤄진다. 잉여 생산물을 교류한 세계무역의 흐름은 1000년경 세계 각지에서 태동했다. 항로 개척은 서구 열강의 전유물이 아니라 바다를 품고 살아온 여러 토착 민족들의 일상이었다.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바다 너머로 진출한 이들이야말로 세계를 연결한 주인공이었던 셈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