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없으면서 연이은 기부, 대외 홍보 대규모 공장-강남 스테이크 전문점 세워 기업인 행세 후순위 투자금으로 선순위 원금 ‘돌려 막기’ 투자자 1400명 속여 1700억 원 빼돌려 베트남 도주했던 사기범 국내 송환
숙성을 통해 1등급 고기로 바꿀 수 있는 신기술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언뜻 들으면 솔깃한데 ‘과연 가능할까?’도 싶은 이 기술을 내세운 사기에 2017년 7월부터 2019년 8월까지 무려 1400여 명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전체 투자 금액은 1조 112억 원, 수많은 피해자들이 투자했다가 돌려받지 못한 피해 금액은 약 1656억 원에 이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경찰은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및 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사기 피의자 A 씨(66)를 베트남 공안과의 국제공조를 통해 검거, 7일 국내로 송환했습니다.
베트남 공안에 붙잡힌 뒤 한국 경찰 호송관에 이끌려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사기 피의자 A씨.
2017년 A 씨는 “저등급 육류를 1등급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며 서울 강남 일대에서 공범들과 사업 설명회를 열었습니다. 투자자들에겐 원금의 3%를 수익으로 보장한다면서 또 다른 투자자를 유치하면 투자액의 3~5%를 추천 수당으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어 후순위 투자자들의 돈을 받아 먼저 투자한 이들의 원금을 일부 돌려주는 등 전형적인 다단계 폰지사기를 벌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A 씨에게 호송 절차를 설명하는 경찰관.
●대규모 공장 준공, 서울 강남서 사업설명회도
이런 일방적 주장만으론 피해자들을 납득시키긴 힘들었겠죠. A 씨는 육류가공업 분야 사업체도 설립했습니다. 실제로 A 씨는 빙온숙성육 브랜드까지 만들어 소고기, 돼지고기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연이은 기부, 회사 직원 크루즈 여행 과시
A 씨 이름과 기업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건 인터뷰, 기부 관련 기사입니다. 그는 인터뷰 때마다 빙온젤 기술을 끊임없이 언급했습니다. 앞으로 비전이 큰 분야이며, 자사가 엄청난 기술을 보유했고,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들입니다.그가 서울 강남 일대에 스테이크 전문점을 열었을 때도 그의 사진과 인터뷰가 여러 매체에서 소개됐습니다. 충북 음성의 공장 준공식 관련 기사도 여럿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기부에 대한 ‘미담’ 기사도 많습니다. A 씨는 지역자치단체는 물론 크고 작은 여러 협회와 단체, 심지어 미인대회 시상식까지 찾아다녔습니다. A 씨는 각 단체에 자사 제품인 고기나 상금으로 현금을 기부했고, 불우한 이웃들을 위한 자선행사도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증사진’을 꼭 찍어 남겼습니다. 서울 강남에 스테이크 전문점까지 개업한 그는 누가 보더라도 ‘건실한 기업인’이었습니다.
포털 사이트엔 지금도 A 씨가 ‘셀프 등록’한 프로필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회사 대표이자 기업인으로 소개해놨습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회사 직원들이 호화 크루즈 여행을 즐기는 영상도 올리면서 투자자들을 유혹했습니다.
●‘혹시 진짜 사업가?’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A 씨가 세운 회사는 명확한 수익구조도 없었고, 사기를 치려고 만든 것임이 뚜렷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A 씨 뿐 아니라 공범들 가운데도 사기 전과자가 다수 포함돼 있던 것도 A 씨가 ‘사업’보단 ‘범행’을 노렸다는 걸 짐작케 합니다.
A 씨의 가족들도 범행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A 씨의 아들도 사기 혐의로 현재 구속돼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A 씨의 딸은 주로 홈페이지 등을 관리했는데 역시 사기 혐의로 입건돼 현재 경찰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A 씨는 조기에 거금을 투자한 사람들에겐 몇 차례고 원금을 돌려주며 신뢰를 쌓았습니다. 피해자들이 점차 더 큰 돈을 투자하자 그는 빼돌린 돈을 들고 베트남으로 도주, 잠적했습니다.
사건을 담당했던 임몽수 송파경찰서 수사2과장은 “이 같은 사기의 피해자들은 A 씨 같은 피의자에게 완전히 현혹돼 사업체가 정상 운영된 걸로 믿는 경우가 많다”며 “경찰이 수사에 나선다고 하면 오히려 ‘회사가 위험해진다’라며 항의하는 일도 잦다”고 했습니다.
현재 경찰은 주범 A 씨 외에도 공범을 포함해 총 27명에 대한 수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베트남 하노이의 한 건물 엘리베이터에 노란색 자켓을 입은 A 씨가 탑승하는 모습. 경찰과 베트남 공안은 인근 여러 장소에서 A 씨가 오가는 모습을 포착하고 그를 붙잡았다.
●베트남 도피 끝 송환
현지 경찰에 붙잡힌 A 씨는 한국 여러 언론에 노출됐던 모습과 사뭇 달랐습니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눈에 띄었으며, 콧수염도 기른 상태였습니다. 마스크, 안경, 모자까지 쓴 채 조용히 베트남을 누비던 A 씨를 알아채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번 송환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처음으로 한국의 경찰호송관이 해외에 직접 입국해 피의자를 강제 송환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강기택 경찰청 인터폴국제공조과장은 “해외로 도주한 피의자를 검거하고 피해금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국제공조를 적극 이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