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진 전 ECCC 국제재판관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은 설립 요청에서 최종 판결까지 무려 25년이나 걸렸다. 몰락한 약소국의 전범조차 그런데 우리가 과연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단죄할 수 있을까. 백강진 전 ECCC 국제재판관(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독일은 지난해 유대인 집단학살에 관여한 혐의로 100세 된 노인을 법정에 세웠다”며 “포기하지 말고 긴 호흡으로 국제형사법 절차를 밟으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백강진 전 국제재판관 제공
이진구 기자
《블라디미르 푸틴을 전범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국제사법재판소(ICJ) 국제형사재판소(ICC) 모두 현실적 제약 때문에 처벌은커녕 재판 자체도 열 수 없는 상황. 백강진 전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전범특별재판소(ECCC) 국제재판관(53·광주고법 부장판사)은 “ECCC 같은 특별재판소 모델은 정해진 틀이 없기 때문에 유엔과 당사국 합의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며 “전범은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에 재판을 먼저 시작하고 푸틴 실각 후 형을 집행할 방법을 찾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귀가 번쩍 뜨이는데….
“ICJ는 국가 간 분쟁만 다루고, ICC는 결석재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푸틴을 잡아오지 않는 한 열 수 없다. 반면 특별재판소는 합의하기 나름이다.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2006년 설립한 ECCC는 캄보디아 정부 안에 법원을 두되, 유엔이 파견한 국제재판관과 캄보디아 판사가 함께 재판하는 형식이다. 레바논 총리 암살테러 사건으로 설립된 유엔 레바논특별재판소(STL)는 결석재판을 인정한다.”
“물론 피고의 항변권에 제약이 있고, 이 때문에 판결이 과연 적절하냐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전범특별재판소는 당장 한두 달 만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CCC도 논의 시작부터 설립까지 10년 가까이 걸렸다. 일단 논의를 시작하고 우려되는 점을 보완하면 된다. ICC가 있음에도 코소보, 시에라리온, 동티모르, 캄보디아, 레바논 등에 특별재판소가 계속 생긴 것도 각 지역과 상황의 특수성을 반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다 못하면 국제형사정의는 어떻게 실현하나.”
―특별재판소가 푸틴을 전범으로 판결해도 처벌할 수는 없는데….
“푸틴이 실각하지 않는 한 처벌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재판을 열어 그가 전범이라는 걸 전 세계에 확인시키고, 법적으로 유효한 증거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크메르루주 정권(1975∼1979년)에서 170만 명이 학살됐지만 재판은 약 30년이 지난 2006년에야 시작됐다. 여기에 재판에 16년이나 걸리면서 고령인 피고들 대부분이 사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인과 증거도 사라진다.” (안 그래도 러시아는 범죄 증거들을 인멸하고 있다.) “전 세계가 특별재판과 경제 제재로 압박을 하고, 이로 인해 러시아에서 푸틴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그 결과 반푸틴 세력이 집권하면 죗값을 받게 할 날이 올 수 있다. ECCC가 만들어진 배경도 이와 비슷하다.”
―ECCC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
―늦게나마 전범재판이 열린 건 다행이지만 달랑 9명만 기소하고, 그중 3명만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럴 거면 뭐하러 했느냐는 말이 나올 만도 한데.
“그게 전범재판이 어려운 이유인데… 모든 관련자를 다 처벌할 수도 없는 데다 캄보디아 정부가 유엔과 설립 조약을 맺을 때 기소 범위를 ‘고위 지도자 및 중대범죄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로 한정했다. 재판관도 캄보디아 판사가 한 명 더 많게 구성하도록 하고….” (그럴 거면 유엔이 함께할 이유가 없지 않나.) “유엔은 법정은 외국에 두고, 혼합으로 재판관을 구성하되 유엔이 임명한 국제재판관이 더 많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래야 공정한 판결이 담보되니까. 캄보디아가 끝내 양보를 안 하자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협의를 중단했다. 그런데….”
―유엔 사무총장이 ‘패싱’된 건가?
“미국이 주도해서 (캄보디아 주장대로) 유엔 총회에 안건을 상정하고 통과시켜 버렸다. 그리고 총회 결정을 사무총장에게 집행하도록 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소 범위에 한계가 있었다. 또 30년 가까이 지난 뒤에 재판이 시작되다보니 폴 포트 등 책임 있는 자들 상당수는 이미 죽었고, 재판 과정에서 또 여러 명이 죽었다. 실형(종신형)을 받은 3명 중 카잉 구엑 에아브 투올슬렝 교도소장은 2020년 병원에서 죽었고, 누온 체아 공산당 부서기장은 형 확정 3년 후인 2019년 93세로 사망했다.” (무늬만 종신형인 셈인데.) “미흡한 점도 많지만 30년 넘게 이루어지지 않은 법적 책임을 지웠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전범재판을 시작해야 한다.”
“키우 삼판 전 국가 주석(91)이 구치소 같은 데 있기는 한데….” (‘구치소 같은 데’라니?) “구치소는 아니고 동남아에서 볼 수 있는 별장 같은 곳에서 일종의 가택연금 형식으로 지내고 있다. 올해 말 항소심 결과가 나오는데 그때까지는 거기에서 산다. ECCC 재정담당자가 마사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푸념하더라.” (전범에게 마사지라니.) “아이러니하기는 한데… 아프다고 하는데 방치했다가 만에 하나라도 죽으면 안 되니까. 살아있어야 재판도 할 수 있지 않나.”
백강진 전 ECCC 국제재판관.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어느 날은 출근하니까 내 방 창문틀에 죽은 새가 매달려 있더라. 다리가 실에 묶여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피가 흥건했다. 조사를 요청했더니 돌아온 답이… 다리에 실이 묶인 새가 날아가다 그 끈이 내 방 창문에 걸려 죽은 거라고 하더라.” (푸틴을 재판하면 러시아는 새 정도로 끝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유엔에서 파견된 경호팀이 있는데 나는 선고 다음 날 경호를 해제했다. 그런데 프랑스 판사는 귀국할 때까지 유지하더라. 아, 안 그래도 우크라이나가 곧 유엔에 특별재판소 설립을 요청할 거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나?) “ECCC에서 함께 일한 유엔 직원 중에 우크라이나 직원이 두 명 있는데 계속 연락을 하고 있다. 막 법안을 만들었는데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국제사회가 푸틴을 비난하지만 실제 재판을 여는 데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참할지 솔직히 의문이다.
“수십 년간 내전 상태였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군뿐만 아니라 미군 및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보다 못한 ICC가 2020년 3월 아프가니스탄이 ICC에 가입한 2003년 5월 이후의 미군 범죄에 대해 파투 벤수다 소추관의 수사 개시를 허가했다. 그랬더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발동해 ICC 수사에 직접 관여하는 인사들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고 이들과 직계가족, 피고용인의 미국 입국을 금지했다. 벤수다 소추관은 그전에 미국 입국 비자를 취소당했다.”
―국제기구가 아프리카에서만 힘을 쓴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미국과 러시아는 ICC 회원국도 아니다. ICC에 가입하면 자국민이 나쁜 짓하면 잡아서 갖다줘야 할 의무가 생기니까.”
※미국복무요원보호법은 미국인이 ICC에 구금된 경우 대통령은 구출을 위해 적절하고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권한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170만 명이나 죽인 전범들에게 왜 사형을 선고하지 않은 건가.
“국제적으로 사형제가 있는 나라도 있지만 사형제 폐지에 찬성하는 나라들이 더 많아서 그게 반영됐다. 완전히 합의된 건 아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전범재판 이후로는 국제재판에서 관습적으로 사형 판결은 안 하고 있다. 푸틴도 사형까지는 안 나올 수 있다. 대신 전범에게는 공소시효와 사면이 없다.”
―법과 인륜을 초월한 전범들에게 너무 관대한 것 같은데….
“미국이 나치 전범 재판을 열자 윈스턴 처칠은 즉결 처분하지 않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했다. 그때 수석 검사를 맡았던 미국의 로버트 하윗 잭슨 연방대법관이 이런 말을 했다. ‘이 재판에서 일부는 무죄를 받고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걸 허용하는 게 문명이다. 재판에 회부한다는 것은 무죄로 풀려날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처벌만을 위해 만들어진 법원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이 재판의 실제 원고는 문명’이라고.” (너무 멋진 말인데 속은 쓰리다.) “역사적으로 우리를 퇴행시킬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지만 인류가 그래도 조금씩 전진해온 건 이런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