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17일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 속 ‘한강공원’ 맵에 접속한 화면.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중학교 2학년 A양은 한 메타버스 플랫폼 내에서 교복을 입은 남성 캐릭터 B로부터 ‘왕게임’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특정 건물에 먼저 올라가기’, ‘음식 빨리 먹기’ 등 메타버스 내 특정 과제를 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자는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 응했지만 B는 ‘사진을 보내달라’는 등 더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B는 부계정까지 만들어 A양을 따라다녔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메시지는 물론 메타버스상 A양의 집 주변에 낙서까지 했다. B는 A양에게 거짓 소문을 퍼트리겠다고 협박한 후 아바타를 통해 유사 성행위를 하는 듯한 행동도 요구했다.
일부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언어적 성희롱·스토킹 등 사이버폭력이 잇따르고 있다. 이 같은 행위는 개인이 가상공간 활동을 위해 만든 ‘아바타’를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다. 가상 공간은 현실 세계와 비교해 타인에 대한 심리적 경계가 낮은 만큼 방치할 경우 자칫 디지털 성범죄로 진화할 위험이 크다.
◇ 메타버스 이용자 10명 중 7명 아동·청소년…성범죄 우려↑
메타버스 플랫폼 이프랜드 내 마련된 ‘벚꽃엔딩’ 랜드 속 화면.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이런 메타버스에서 미성년자에게 신체 부위 사진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바타를 강제추행 하는 등 신종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 아바타에게 유사 성행위 자세를 취하게 해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과거 텔레그램을 이용해 온·오프라인을 오가며 이어진 성착취 범죄가 메타버스에서 반복될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주 이용층이 성범죄에 대한 개념이 잡히지 않은 아동·청소년인데다 이용자가 증가하는 추세를 고려하면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설령 피해를 입어도 입증이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드러나지 않은 피해 사례도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사이버공간·휴대전화를 통해 발생한 온라인 성착취 범죄는 2016년 전체의 4.7%에서 2020년 12.9%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문제는 관련 범죄가 급증할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다.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는 ‘치안전망 2022’ 보고서에서 메타버스 플랫폼을 중심으로 재산권 침해, 아동·청소년 성폭력 등 신종 범죄가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준화 국회 입법조사처 과학방송통신팀 조사관은 “메타버스 이용자가 늘어나며 아바타에 대한 성범죄도 발생하고 있다”며 “10대·여성 이용자의 규모가 증가하는 추세를 고려하면 관련 성범죄도 앞으로 늘어날 우려가 크다”고 설명했다.
◇ 아바타 성희롱·스토킹 처벌…기존 법률론 한계
그러나 현행법상 메타버스에서 일어난 일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자녀가 만든 아바타가 가상세계에서 언어적 성희롱이나 스토킹, 불법촬영, 유사 성행위 등의 피해를 입더라도 처벌은 쉽지 않다는 의미다.
흐름에 맞는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국회와 관계부처 간 토론회 등이 연이어 열리고 있으나 구체화까지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가상공간에서 아바타끼리 벌이는 행위까지 전부 범죄로 보는 건 과잉 입법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와 관련해 기술적인 조치를 통해 범죄 행위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채팅 시 특정 단어를 쓰지 못하도록 한 ‘금칙어’ 설정도 현재 단어 사이에 별도 문자를 넣으면 충분히 뜻이 전달되는 상황이라 고도화가 필요하다.
해외에선 선제적인 움직임도 보인다. 최근 메타(옛 페이스북)는 메타버스 플랫폼 ‘호라이즌 월드’ ‘호라이즌 베뉴’에 성범죄 방지를 위한 아바타 간 거리두기 기능을 최근 도입했다. 아바타 주변에 ‘개인 경계선’을 부여, 아바타 간 4피트(약 1.2m)의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 것인데 이는 아바타 간 원치 않는 성적 접촉과 괴롭힘을 막기 위한 조치다.
향후 수사와 재판 과정을 위해 서비스 제공 업체가 가해자에 대한 인적 정보를 보존·관리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국제 공조와 기간 관 협력도 필수다. 가해자나 본사가 외국에 있을 경우 현실적으로 처벌이 쉽지 않다. 지난 1월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던 신민영 변호사(법무법인 예현)는 “처벌규정 부재로 인한 문제보다는 수사관할권의 문제가 본질”이라며 “수사 관할 및 협조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준화 조사관은 “메타버스 내 성범죄의 세부적인 통계를 수집·분석해 이에 근거한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수사 기관과 법·제도를 담당하는 부처 간 정보공유와 협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