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이 넘은 저는 그동안 충분히 누렸으니, 이제는 전통 유산을 잇는 예술인들을 위한 공간을 남겨주고 싶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이영희 씨(84)는 자신이 일평생 일궈 소유한 집과 주변 토지 5474㎡(약 1700평)를 문화재청에 기부했다. 올 2월 기부 결단을 내린 그는 문화재청 측에 단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이 땅에 국악 등 우리의 전통 예능 유산을 잇는 보유자와 이수자들을 위한 교육관을 지어 달라”는 것.
문화재청은 “이 씨가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건립을 위해 경기 성남시 금토동 일대 1700평에 이르는 토지를 기부했다”고 19일 밝혔다. 이 씨의 자택이 위치한 해당 토지의 공시지가는 54억여 원에 달한다. 이 씨는 18일 오후 동아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전통 예술인들의 삶은 늘 넉넉하지 못했다”며 “후학을 양성할 공간이 부족해 비좁은 자택에서 전수활동을 해온 예능인들에게 보탬이 되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저는 이제 떠나야 할 때예요. 문화재청에는 여생 동안 머물 20평 남짓한 공간만 전수교육관 한편에 내어달라고 했어요. 생을 떠난 뒤에는 이 땅에 납골함을 묻어달라고도 당부했죠. 저는 이 정도면 충분해요.”
1938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이 씨는 1958년 가야금 명인 김윤덕 선생(1918~1978)으로부터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1962년 대학 졸업 후 국악예술학교 교사, 서울대 및 중앙대 국악과 강사를 지내며 60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1991년 김 선생의 뒤를 이어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인정된 그는 아직까지도 주말마다 제자 10여 명에게 가야금산조를 가르치는 현역이다. 그에게서 가야금산조를 배운 이수자는 50여 명에 이른다.
늘 자신보다 제자들을 생각했다. 이 씨는 2018년부터 스승인 김윤덕류 가야금산조를 공부하는 후학들을 위해 매년 2~3000만 원 상당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까지 10여 명의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았다. 2018년 경기 성남시와 연계해 자택 근처 초등학교 4곳에 4000만 원 상당의 가야금 160대를 기증하기도 했다. 이 씨는 “일평생 나를 위해 사치를 부려본 적이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을 제자들과 나눌 때 가장 큰 기쁨을 얻었다”며 웃었다.
문화재청은 기부자의 뜻에 따라 해당 토지에 2027년까지 연면적 8246㎡ 규모의 수도권 국가무형문화재 예능전수교육관을 지을 계획이다.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 건물에는 이 씨의 바람대로 예능인들이 전수활동을 펼칠 교육공간뿐 아니라 공연장과 전통 예능 체험공간도 마련된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