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때때로 신화의 힘을 빌려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신화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아득한 옛날, 어느 산골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두가 지독하게 가난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희한한 풍습이 생겼다. 누구든 일흔 살이 되면 산속에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처한 궁핍한 현실에서 노인은 버려도 되는 일종의 잉여물이었다.
그렇다고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아들은 산속에 가서도 어머니를 두고 갈 수 없다며 울고,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뺨을 때리며 순리를 따르라고 다그친다. 서로에게 못할 짓이다. 아들은 밖으로 울고 어머니는 안으로 운다. 결국 아들은 어머니를 두고 돌아선다. 프로이트가 말한 현실원칙이 이긴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그의 아내가 어머니의 옷을 입고 있다. 누군가는 그렇게 버려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삶을 이어간다. 그 사람의 옷을 입고 그 사람 몫을 먹으며.
“문명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는 발터 베냐민의 말대로 야만적인 시대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덜 야만적일까. 가난한 노인은 더 이상 잉여적 존재가 아닐까. 노인들이 버려지던 슬픔의 산은 형태만 다르지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신화마저도 잃어버리고.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