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수목원 ‘재배식물’ 전환 논란
천연기념물 제159호인 제주시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의 우람한 왕벚나무는 마치 하얀 눈으로 덮인 듯 화려한 꽃을 피운다. 국립수목원이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 명칭을 변경하면서 왕벚나무 대신 ‘제주왕벚나무’로 표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17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한라생태숲 부근 해발 580m의 왕벚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제159호). 높이 11m에 이르는 왕벚나무가 가지를 사방으로 뻗은 웅장한 수형을 보였다.
오랜 세월 벌어졌던 줄기는 찢길 위기에 놓이면서 지지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눈이 덮인 듯 하얗게 피어났던 왕벚꽃은 거의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연둣빛 새잎이 돋아났다. 10여 m 떨어진 곳에선 비슷한 규모의 왕벚나무 2그루가 때죽나무, 상산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다.
이들 왕벚나무 자생지가 한라산 산간지대라는 사실이 여러 차례 연구로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원산지 논쟁이 이어진 데 이어 이번에는 명칭에 논란이 생겼다. 국립수목원이 국가표준식물목록에 왕벚나무를 삭제하고 자생식물이 아닌 재배식물로 수정했으며 ‘제주왕벚나무’로 표기한 사실이 최근 알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왕벚나무를 일본명인 ‘소메이요시노’라고 표기했다. 왕벚나무 명칭을 일본에 내준 셈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왕벚나무 원산지를 놓고는 일본과 그동안 상당한 논쟁을 벌였다. 1908년 프랑스인 에밀 타케 신부가 한라산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확인한 후 한국 학자들은 왕벚나무가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주장했고, 일본 학자들은 수백 년 전부터 일본에 자생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국립수목원은 2018년 게놈 바이올로지에 게재한 유전자 분석 논문에서 제주의 왕벚나무는 올벚나무가 모계, 산벚나무(또는 벚나무)가 부계인 자연교잡종으로 나타났으며 일본 왕벚나무인 소메이요시노는 올벚나무가 모계인 점은 같으나 부계가 오시마벚나무로 확인했다는 내용을 밝혔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지역에 가로수로 심어진 왕벚나무들. 이들은 제주에서 자생한 왕벚나무와는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국립수목원 관계자는 “국내에 보급된 일본산 왕벚나무와 구별하기 위해 ‘제주왕벚나무’ 명칭을 부여했는데 제주왕벚나무만을 왕벚나무 명칭으로 쓴다면 거리에 심어진 일본산을 재배왕벚나무 또는 소메이요시노 등으로 불러야 하는 상황”이라며 “공감대가 형성되거나 각계에서 이의가 있으면 왕벚나무 명칭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자생하는 벚나무류 200여 종 가운데 국내에 10여 종이 있다. 왕벚나무는 다른 벚나무 종에 비해 꽃이 크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가로수나 조경수 등으로 심어졌는데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자생 왕벚나무를 보급하기 위해 2월 출범한 왕벚프로젝트2050(회장 신준환)이 최근 국회와 여의도 지역 왕벚나무를 조사한 결과 국내 특산은 없고 대부분 일본 소메이요시노인 것으로 확인했다. 제주지역 왕벚꽃축제 등이 펼쳐지는 도심 왕벚나무 역시 일본산과 국내 벚나무를 접목하거나 일본 소메이요시노를 심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