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2022.3.14/뉴스1
●군형법 “항문성교나 추행은 징역 2년”인데 무죄 이유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 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이날 군형법 96조의2(추행) 혐의로 기소된 남성 군인 A 씨와 B 씨에 대해 유죄로 판결한 2심을 파기하고 무죄 취지로 판결하며 14년 만에 판례를 변경했다.A 씨는 2016년 B 씨의 독신자 숙소에서 2회에 걸쳐 성관계를 가진 혐의로 기소됐다. 1,2심은 “영외에서 자발적 합의로 이루어진 동성 간 성행위에도 군형법상 추행죄가 적용된다”며 유죄를 인정했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하지만 대법원은 법률 문언만을 따지지 않고 법이 왜 만들어졌는지, 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이익은 무엇인지, 즉 군형법 96조의2의 보호법익이 무엇인지 살폈다.
법익은 개인의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해 보장해야 할 이익으로, 형법은 이 법익을 침해하거나 위태롭게 하는 행위를 처벌한다. 가령 절도죄를 제정해서 보호하고자 하는 법익은 개인의 소유권이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면 사람이나 물건이 침해된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소유권이 침해된 것으로 본다.
●“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군기와 성적 자기결정권”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앞두고 배석해 있다. 2022.4.21/뉴스1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폭력 범죄의 대표적인 보호법익으로, 적극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성 생활을 결정할 자유와 소극적으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과의 성행위를 거부할 자유를 포함한다.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10조상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따라 성적 자기결정권을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군기와 성적 자기결정권 모두 침해되지 않았으니 영외에서 합의 하에 이뤄진 동성 군인 간 성행위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형법이 처벌을 내리는 이유는 보호법익을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보호법익이 침해되지 않았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수의견은 항문성교가 동성 간 성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성 간 성행위라는 이유로 무조건 처벌할 순 없다고 설명했다. 다수의견은 “문언만으로는 이성 간에도 가능한 행위”라며 “동성 군인 간의 성행위 그 자체를 처벌하는 규정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고 했다.
추행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도 나왔다. 다수의견은 “동성 간 성행위가 객관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하는 ‘추행’이라고 보는 것은 이 시대 보편타당한 규범이 아니다”라고 했다.
●“처벌 안 되지만 성적 자기결정권은 보호법익 아냐” 별개의견도
다수의견과 달리 안철상 이흥구 대법관은 별개의견을 통해 성적 자기결정권은 군형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이익, 즉 보호법익이 아니라고 봤다.두 대법관은 A 씨와 B 씨를 처벌할 수 없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별개의견은 “군형법은 전시 상황이나 군사훈련 등 군기를 침해할 우려가 큰 상황에서만 적용된다고 봐야 한다”며 “피고인들을 처벌할 수 없다는 다수의견에는 동의한다”고 했다.
하지만 보호법익에 대해 두 대법관은 “현행 규정의 보호법익에 성적 자기결정권이 포함된다고 볼 수는 없다”며 “합의하에 성행위를 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법률해석을 넘어서는 실질적 입법행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두 대법관은 “인간의 성적 자유를 확장해온 역사적 발전과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세계적 추세에 비춰보면 현행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 헌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헌재 판단과 보호법익 달리 판단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다수의견은 기존 헌법재판소 판단과 상충되는 면이 있어 법조계에선 “한층 더 진보적인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2016년 7월 28일 헌법재판소는 군형법 해당 조문에 대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그러면서 헌재는 해당 군형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법익이 군기이고, 성적 자기결정권은 아니라고 판단했다.헌재는 “해당 군형법 조항은 군 내부의 건전한 공적생활을 영위하고 군 조직 전체의 성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서, 주된 보호법익은 ‘개인의 성적 자유’가 아니라 ‘군이라는 공동사회의 건전한 생활과 군기’라는 법익”이라고 설명했다.
박상준 기자 speak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