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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 안 보낸다” 장관 장담에도…‘1년 의무복무’ 피하려는 러 청년들

입력 | 2022-04-23 00:31:00

우크라이나 전쟁에 징집 피하려는 문의 급증
입영사무소 화염병 공격도
청년 총알받이 만든 과거 트라우마에 깊은 불신




러시아 국방부가 4월부터 시작된 모병 기간 동안 신규 병사 13만 명 모집을 계획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끌려갈 것을 우려하는 청년들은 입대를 기피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TV 연설에서 “신규 모집 병사는 단 한 명도 전장에 투입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의 주둔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피해규모도 막심해 청년들과 이들의 가족을 설득하기엔 역부족이었다고 전했다.

러시아에서 18세~27세 모든 청년은 1년간 의무 복무를 해야 한다. 입대 모집은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이뤄진다. 징집을 기피할 경우에는 최대 2년 징역 혹은 무거운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WP는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러시아의 ‘양심적 병역거부’ 인권 단체에는 징집대상 청년, 이들의 부인, 여자친구, 가족 등이 징집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3월에 텔레그램 계정을 개설했는데 이 곳에만 지금까지 접수된 상담 문의가 8000건이 넘었다. ‘러시아 병사 어머니 위원회’나 ‘아고라 인권단체’ 등 비슷한 단체에도 징집 회피 문의는 큰 폭으로 늘었다.

이들 단체에서 일하는 한 변호사는 “사람들은 쇼이구 장관의 말을 믿을 수 없다. 그냥 ‘장관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 외에 이를 뒷발침할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군복무 제도와 법상 징집병은 최소 4개월간 전장 파병이 가능하다”라고 전했다.
○전쟁 시작 이후 입영사무소 화염병, 방화 공격 5건
모스크바타임스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화염병 공격 등으로 피해를 입은 러시아 입영사무소가 5곳에 달한다. 가장 최근인 18일에는 서부 모르도비야 지역 입영사무소에 화염병이 날아들어 컴퓨터와 징집병 데이터가 손상돼 징집병 모집이 일시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3월에도 보로네즈, 스베르들롭스크, 이바노보 지역의 입영사무소에도 화염병 공격이 있었다.

범인으로 붙잡혀 구금된 청년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저항해 군대의 징집 절차를 방해하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전쟁 발발 나흘 만인 2월 28일 모스크바 루호비치 마을에는 21세 청년이 지역 입영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그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사무소의 자료를 없애려 했다고 밝혔다. 구금된 이들은 재물 손괴, 살인미수, 및 테러리즘의 혐의를 받고 있다.
○군 부정부패 불신, 특권층 군 면제-유예 만연
WP는 러시아에서는 군관료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다며 많은 이들이 1990년대~2000년대 초반 체첸 전쟁 당시의 트라우마를 기억하고 있다고 전했다. 당시 전쟁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러시아 청년 수천 명이 전장에서 총알받이로 목숨을 잃었다. 이는 ‘러시아 병사 어머니 위원회’ 같은 단체가 전쟁 포로 석방, 유해 송환 등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들 단체는 군대 내 가혹행위, 인권 학대, 필수품 부족 등의 고질적인 군 문제의 개혁을 이끌기도 했다.

징병을 피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건강 문제, 대학생 유예기간 활용이 꼽힌다. 하지만 입영 사무소는 이러한 이유들을 항상 받아들여주지는 않는다고 WP는 전했다. 특권층 사이에서 군면제와 유예가 더 흔하고 기준도 일정치 않아 징병의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도 끊이지 않는다.

입영사무소가 부정부패 사건의 중심이 되는 경우도 많다. 신체검사를 하는 의사, 사무원, 군 관료들 사이에서 수 천 달러를 받고 징병을 피할 수 있는 병역 기록 카드를 파는 네트워크가 암암리에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이 카드의 가격도 계속 올라 러시아 부유층 부모들 사이에는 하나는 자녀 대학 등록금용, 다른 하나는 입영사무소 뇌물용으로 자녀를 위한 예금 통장 두 개를 만들어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나오고 있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