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황룡사지에서 나온 ‘치미’(왼쪽 사진). 건물 용마루 끝에 올려 장식하는 기와로 높이가 182cm에 달해 황룡사지 건물이 매우 크고 웅대했음을 말해준다. 황룡사 목탑 하부에서 출토된 고리 지름 3.43cm의 금동귀걸이(위 사진)와 높이 12cm의 백자 소호.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고려 고종 때인 1238년 몽골군은 경주에 다다라 닥치는 대로 약탈을 자행했다. 그들의 약탈에서 사찰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룡사에 난입한 몽골군은 곳곳을 헤집고 급기야 불까지 질렀다. 무자비한 화마는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 두 가지에 해당하는 장육존상과 9층탑을 집어삼켰다. 수백 년 동안 경주의 랜드마크였던 황룡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차츰 세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1976년 그 터에 대한 발굴이 시작됐다. 당초 3년 예정으로 착수했지만 땅속은 예사롭지 않았다. 건물은 모두 사라졌으나 주춧돌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절에서 쓰였던 유물들이 쏟아졌기에 발굴을 마무리하기까지 8년이나 걸렸다. 조사 결과 황룡사는 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배치되었고 특히 금당은 동서로 3동이 배열되었음이 밝혀졌다. 회랑으로 둘러싸인 절 내부의 면적은 무려 2만4500여 평에 달했다. 황룡사는 어떤 절이었고, 이 절터는 어떤 비밀을 토해냈을까.
○ “황룡이 나타났다”
삼국사기에는 황룡사 창건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실려 있다. 신라 진흥왕은 스무 살이 되던 553년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라고 명을 내렸는데,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나자 괴이하게 여겨 궁궐 대신 절을 짓고 황룡(皇龍)이란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황룡이 나타났다는 기록을 믿을 수는 없지만 궁궐을 지으려다 포기하고 그곳에 절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실로 볼 수 있다.1976년 황룡사지 하부에 깊게 도랑을 파서 토층 퇴적 상태를 조사한 결과, 절이 들어서기 전에는 저습지였음이 밝혀졌다. 신라인들은 그곳에 물의 신, 용이 살고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 넓은 저습지를 메워 터를 만드는 공사는 국가 차원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작업을 마무리하고 담장까지 설치한 것은 공사의 첫 삽을 뜬 지 16년이나 지난 569년의 일이다.
○ 층마다 가상 적국들 이름 새긴 9층탑
신라 선덕여왕 때 당에서 귀국한 자장 법사가 9층탑 건립을 건의했다. 그 무렵 신라는 그러한 건축물을 세워본 경험이 없었기에 백제에 장인을 요청했다. 그에 응해 백제가 파견한 인물이 아비지(阿非知)다. 그가 주도하고 신라의 목공 200명이 힘을 합쳐 높이 80m에 달하는 9층탑을 645년에 완공했다.삼국유사에 인용된 신라 승려 안홍의 책에는 신라에 위협이 되는 나라들의 침입을 막으려 9층탑의 층마다 일본, 중화, 오월 등 가상 적국을 할당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당시 신라가 주변국의 침입을 경계하고 또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황룡사지는 광복 이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이미 곳곳에 가옥이 들어서 있었다. 특히 9층탑 기초부 위에도 집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정부는 1964년 그 집을 매입해 철거했는데 그 조치가 문제를 불러왔다. 사리구가 봉안된 심초석이 외부로 드러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굴꾼들이 야음을 틈타 사리구를 훔쳐 달아난 것이다. 2년 후 우연히 도굴 사실이 알려져 사리구의 일부를 가까스로 회수할 수 있었다.
○ 황룡사 남쪽 축구장 3.5개 크기 광장
절터 내부에 대한 발굴에 이어 1987년부터 근래까지 수십 년에 걸쳐 절터 외곽에 대한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황룡사가 섬처럼 홀로이 떨어져 있지 않았고 신라 왕경의 핵심 요지에 자리했음이 밝혀졌다. 절 담장 밖에는 넓은 포장도로가 시설되었고 동남쪽과 서남쪽 모퉁이에는 큼지막한 교차로가 있었다. 절 주변의 정연하게 구획된 공간에서는 신라 왕경인들의 가옥이 연이어 발견됐다.신라의 왕궁인 월성은 경주 분지 전체로 보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북쪽으로는 마립간기 왕릉들이 자리해 있고 남쪽으로는 남천이 흐른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발굴 결과로 보면 경주 분지 도시 구획의 기준점은 월성이 아닌 황룡사였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근래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황룡사지 남쪽에서 발굴한 광장이 학계의 시선을 끌고 있다. 잔자갈을 곱게 깐 이 광장은 동서 500m, 남북 50m 크기로 국제 규격 축구장 3.5개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이곳에서 신라왕은 군사를 사열하거나 중요 행사를 주관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황룡사는 통상의 사찰과는 다른 매우 특별한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사찰이었으나 차츰 신라인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호국 도량으로 변모했다. 아마도 신라의 ‘삼한일통(三韓一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불국토에 산다고 생각한 신라인들에게 황룡사는 온갖 두려움을 완화하는 성소였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될 발굴 및 연구를 통해 황룡사의 실체가 조금 더 생생하게 드러나길 기대한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