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 손아섭이 삼진 콜을 당한 후 KT 포수 장성우에게 항의하는 모습. NC다이노스 제공
2년 전 시즌 초반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한화 이글스에서 뛰던 베테랑 외야수 이용규는 5월 7일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와의 경기에서 결승타를 친 뒤 방송사 인터뷰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용규는 뜻밖의 작심 발언을 합니다.
“선수들 대부분이 (스트라이크와 볼) 판정의 일관성에 대해 불만이 굉장히 많다.”
2년이 지났습니다. KBO 심판들은 선수들로부터 얼마나 신뢰를 받고 있을까요.
시즌이 시작한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다시 이용규가 나섰습니다. 작년부터 키움 히어로즈에서 뛰고 있는 이용규는 시즌 3번째 경기인 5일 LG 트윈스전에서 말 대신 행동으로 심판 볼판정에 대해 불만을 표현했습니다. 9회말 바깥쪽으로 빠졌다고 생각한 공이 스트라이크로 선언돼 삼진 아웃을 당하자 배트를 타석에 그냥 둔 채 더그아웃으로 향했습니다. 항의의 뜻으로 받아들인 주심은 이용규를 향해 곧바로 퇴장 명령을 내렸습니다. 올 시즌 1호 퇴장이었지요.
2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시즌에 앞서 이미 예견된 바였으니까요. 올 시즌에 앞서 KBO는 스트라이크 존 정상화를 향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시즌에 앞서 허운 심판위원장이 직접 나서 언론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갖기도 했지요. 정상화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제로는 스트라이크 존을 예전에 비해 넓히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볼로 판정되었던 공이 이제는 스트라이크 콜을 받습니다. 투수는 유리해지지만 타자는 불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뉴시스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유지해오던 심판과 타자들의 갈등은 그런데 지난 주말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듯 합니다. 그 동안 타자들은 높은 공이나 바깥쪽으로 빠진 듯한 공에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아도 꾹 참아왔습니다.
그런데 주말 주말을 기점으로 타자들의 본격적인 발발이 시작됐습니다. 23일에는 LG의 간판타자 김현수와 삼성 외국인 타자 피렐라가 스트라이크 존 판정에 반발에 항의하다 하루에 모두 퇴장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김현수의 경우는 예전처럼 강한 항의가 아니라 주심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정도였지만 구심은 퇴장을 명했습니다. 삼성 임시 주장 피렐라도 롯데와의 경기에서 5회 스트라이크 콜에 항의하다 퇴장조치 됐습니다.
하루 앞선 22일에는 NC 다이노스 손아섭이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바깥쪽 높은 공에 삼진 아웃을 당한 뒤 펄쩍 뛰며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던 장성우에게 “이게 스트라이크야? 스트라이크냐고?”라며 크게 소리치며 항의하는 보기 드문 일도 있었습니다. 심판을 향한 항의가 아니었던 탓에 퇴장을 면했지만 손아섭은 덕아웃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참 동안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LG 트윈스 제공
스트라이크와 볼 판정은 한편으로는 ‘밥그릇’ 싸움이기도 합니다. 타자들에게 안타 하나, 볼넷 하나는 이듬해 연봉과 직결될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의 볼 판정 하나에 따라 안타와 타점이 날아갈 수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야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판정이 계속 쌓이면 언젠가는 폭발하지 않을까요.
각 팀 사령탑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시즌 초반이라 각 팀 벤치에서도 숨을 죽이며 조용히 지켜보는 편입니다. 불만이 있어도 드러내놓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지적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순위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심판의 볼 판정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순간의 볼 판정 하나는 해당 경기는 물론이고 시즌 전체의 판도까지 바꿀 수 있습니다. 선수가 폭발하고, 벤치가 이어받고, 언론이 받아쓰고, 팬들까지 들고 일어날 경우 그 파급력은 어디까지 갈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동아일보 DB
확대된 스트라이크 존은 분명 KBO가 원했던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26일 경기 전까지 올 시즌 9이닝 기준 경기 시간은 3시간 6분으로 작년 3시간 14분에 비해 8분이나 줄었습니다. 투수들의 경기 당 볼넷 허용 개수도 8.96개에서 6.42개로 감소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타자들의 불만은 어떻게 최소화하면서 현재의 스트라이크 존을 시즌 마지막까지 유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매일같이 수비 훈련을 하는 선수들도 실책을 범하듯 하루에 300개 안팎의 볼에 판정을 내리는 심판도 인간이니만큼 실수를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확실한 것은 자칫하면 언제든 예전과 같은 좁은 스트라이크 존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들 역시 싫은 소리 듣기 싫고, 욕 먹고 싶지 않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까요.
이헌재 기자uni@donga.com
이헌재 기자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