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의 자화자찬과 尹 비판은 좌파 핵심세력과 지지자들 향한 메시지 尹, 비켜 있지 말고 검수완박 막는 게 지지해준 국민 뜻 받드는 길
이기홍 대기자
필자는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을 꼽는다.
이 관점에서 열흘 뒤 막을 내리는 문재인 정권을 평가한다면 1987년 민주화 이래 민주주의로부터 가장 멀어졌다는 게 필자의 주관적 결론이다.
내 편 심기를 통한 사법부 장악, 인사권을 이용한 감사원·검찰·선관위 장악 시도가 5공 이래 가장 노골적이었으며, 입법폭주도 지난 35년간 목도하지 못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국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이처럼 실종된 시절은 없었다.
문 대통령이 퇴임 인터뷰를 자화자찬과 자기합리화로 도배한 것이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는 능력이 결핍된 결과인지, 아니면 실제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옳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낯 두꺼움의 산물인지 애써 구분할 필요는 없다.
“역대 정부 중 가장 소통을 잘했다” “부동산 가격 상승폭이 가장 작은 편” 등 삼척동자도 아는 객관적 사실의 정반대 주장을 펴는 것을 보면 간신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이 가장 자랑으로 내세우는 게 전쟁 위기를 해소하고 대화 국면으로 전환시켰다는 논리다.
물론 2017년 하반기 한반도 위기론이 고조되다 2018년 대화 국면으로 급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변화의 동력은 미국의 최고 수위 압박의 결과 탈출구가 필요해진 김정은의 급선회다. 김정은은 2018년 신년사에서 “겨울올림픽 참가”와 “남북대화”를 명백히 밝혔다. 누가 대통령이었어도 그 변화 모드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고 협상 국면으로 전환됐을 것이다.
필자는 문 대통령이 국내외 정책에 도입했다가 참담한 실패로 끝난 좌파적 접근 방법들을 성공한 것인 양 계속 자화자찬하고, 대통령 당선인을 비판하는 바탕에는 명확한 목적의식이 깔려 있다고 본다.
즉 좌파 핵심과 지지층에 “나는 끝까지 우리 진영을 배신하지 않는다. 당신들도 나를 끝까지 보호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제주 해군기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추진했다가 지지층 내 핵심 그룹에게 외면당한 노무현 학습효과로 내 편에 외면당하면 퇴임 후 안전보장이 어렵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내 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언행만 골라 하는 것이다.
민주당 강경파도 검수완박으로 호응하고 있다. 현재의 검수완박은 수사-기소권 분리에 대한 찬반을 떠나 추진 주체들의 의도 시기 절차 등 모든 면에서 상식과 민주주의 원칙의 관점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총선이 치러진 2020년 4월은 전시를 방불케 했던 코로나 위기 상황이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확진·사망자가 무더기로 쏟아진다는 뉴스들을 접하며 국민은 ‘우리는 저 거대한 태풍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아야 할 텐데…’라는 위기감속에서 선장(여당)에게 힘을 몰아줬다. 6·25전쟁 중에 치러진 1952년 지방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압승을 거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정책·이념 지향점에 국민들이 압도적 지지를 보내준 건 아님을 알면서도 그에 맞게 절제하는 상식과 염치는 잊은 것이다.
해결은 결국 국민의 몫이다. 먼저 윤 당선인이 책임지고 나서야 한다. 국민은 문 정권의 패악을 심판하고 정의를 되찾을 적임자라고 여겨 정권을 맡겼다.
광화문과 서초동에 군중이 모이는 그런 극한 대립은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문 정권이 이를 자초하고 있고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가 될 것이다.
검수완박 사태가 없었다면 새 정부가 전임 정권 문제를 건드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의구현을 바라는 국민들 마음속엔 통합·화해를 통해 미래로 가야한다는 상충된 바람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차 민주당의 분열 움직임이 커질 수 있는데 사정 국면이 전개되면 야권을 단결시켜 분열을 막아주는 효과도 생길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민주당 스스로 전임 정권 문제를 국민적 어젠다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국민들은 자기들의 보신을 위해 멀쩡한 교량을 부수고 치외법권의 소도(蘇塗)를 만든 심보가 괘씸해서라도 문 정권 패악의 규명을 요구할 것이다.
5년 내내 민주주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더니 임기 마지막까지 자기들끼리의 벌거숭이 임금님 놀이에 취해, 나라를 다시 거대한 대립의 골짜기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