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개전 초기인 1904년 4월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에 게재된 만평. 러시아는 거인으로, 일본은 소인으로 그리며 러시아의 전쟁 우위를 점친 서구의 시각을 담았다(왼쪽 사진). 1905년 포츠머스조약을 맺는 러시아와 일본 대표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904년 2월 일본은 뤼순항의 러시아함대를 공격했다. 마침내 러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재빨리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인천에 상륙해 버렸다. 전 세계는 긴장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지했고,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응원했다. 비록 극동에서 벌어진 러시아-일본의 전쟁이었지만, 양 진영의 대리전 성격이 다분했다. 전 세계의 피식민지인들도 과연 유색인종이 백인종에 맞서 이길 수 있는지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분열된 러, 일치된 日
청일전쟁은 한반도와 만주가 전쟁터였지만, 이번에는 주로 만주가 주 무대였다. 일본은 거국일치로 결사적이었던 데 비해 러시아는 일본만큼 결연하지 않았다. 차르와 정부 요인들에겐 단호함이 결여되어 있었고, 모스크바와 저 멀리 만주 현지 사이 연락도 원활하지 못했다. 일본 국민들이 거의 전적으로 전쟁 지지에 나선 데 비해 러시아에서는 병사도 국민도 왜 모스크바에서 3000km나 떨어진 곳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전쟁 협력은커녕 1905년 1월 제1차 러시아혁명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전쟁 명분’이 국민과 병사의 사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는 지금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막대한 혈세와 희생 속 승리
러일전쟁은 20세기 총력전의 선구였다. 기관총, 철조망, 참호전이 등장해 대량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 전사자는 10년 전 청일전쟁의 10배였다. 전쟁 비용도 엄청났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이 1개월 동안 사용한 포탄 200만 발을, 일본은 난산(南山)전투에서 하루에 쏟아부었다. 군비는 20억 엔(당시 재정 규모 3억 엔)에 다다랐는데, 78%는 국내외에서 조달한 빚이었다. 국가 경제력과 국민 지지를 총동원하는 전쟁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일본은 런던과 뉴욕에서 막대한 전비를 조달했다. 이를 위해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와 하버드대 출신의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각각 영국과 미국에 파견했다. 국내에서도 비상특별세법을 만들어 엄청난 증세를 했다. 지가의 2.5%였던 지조(地租)는 논밭 5.5%, 시가지 20%로 격증했고, 소득세는 일률적으로 1.7배 증가했다. 비상특별세법이 1904년 4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시행된 결과 일본 국민은 1903년의 납부액과 같은 금액을 한 번 더 납부하게 되었다(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전쟁은 국민의 혈세로 국민의 피를 만주벌판에 뿌리는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비상특별세는 폐지되지 않고 일본 군부의 배를 한껏 불려주었다.
일본의 승리는 피압박민족의 엘리트들을 흥분시켰다. 중국의 쑨원, 베트남의 판보이쩌우, 버마 터키 이란 인도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한국의 안중근까지 일본의 승리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일본은 유색인종의 리더가 아니라 서양 제국주의의 공모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을 식물국가로 만든 것이 신호탄이었다. 일본은 강화도조약(1876년), 시모노세키조약(1895년), 메이지천황의 선전조칙(1904년) 등에서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과 자주를 한국 국민과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처절한 배신이었다.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은 일본의 배신에 목 놓아 울었다(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한국만이 아니었다. 청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협조했지만, 랴오둥반도를 되찾지 못했다. 일본은 오히려 남만주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인도 필리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은 쫓겨났고, 쑨원도 추방당했다. 중국의 류스페이는 “일본은 아시아에서 조선만의 적이 아니다. 동시에 인도 베트남 중국 필리핀의 공적(公敵)이다”라고 힐난했고, 인도의 네루도 “러일전쟁의 결과는 한 줌의 침략적인 제국주의 집단에 또 다른 한 나라를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며 분노를 표했다(야마무로 신이치 ‘러일전쟁의 세기’).
만주 놓고 경쟁자 돼가는 美日
랴오둥반도에 상륙하는 일본군.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한 데 이어 만주를 탐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이때 이미 태평양의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1898년 하와이를 병합한 미국은 스페인을 물리치고 필리핀 괌을 영유했다. 태평양 너머 먼 나라인 줄 알았던 미국이 지역의 이해당사자로 등장해 있었던 것이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반도와 필리핀은 상호 인정했지만 만주는 어림없었다. 이런 미국이 만주에서의 일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 두 나라가 충돌한 것은 한국 합병 후 불과 31년 만이다(1941년 진주만 기습). 지금부터 31년 전이면 1991년이다. 그저 한 세대 동안의 ‘환상 제국’이었던 것이다. 그사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수백만의 일본 청년들이 죽었고, 한국과 중국 국민들은 일본을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30여 년의 ‘영광’은 그에 값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는가. 그건 정말 일본의 ‘국익’에 이로운 것이었을까.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