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화폐 가치가 요즘 경쟁하듯 하락하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255.9원으로 2년여 만의 최고 수준이었다. 같은 날 도쿄 외환시장의 엔-달러 환율은 20년 만의 최고인 131엔으로 상승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이달 기준금리를 올릴 것이란 전망에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원화, 엔화 가치가 나란히 시험대에 올랐다.
▷지금의 ‘엔저’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의 연장선에 있다. 2013년 아베 전 총리의 지명을 받아 취임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디플레이션 극복을 명분으로 마이너스 금리, 무제한 돈 풀기 정책을 10년째 유지하고 있다. 낮은 엔화 가치로 일본 수출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경제를 살리는 게 목적이다.
▷문제는 일본의 생산시설이 이미 해외로 대거 빠져나갔다는 점이다. 일본 자동차 기업 차량의 3분의 2가 해외에서 생산된다. 엔저의 수출 확대 효과가 크게 줄었다. 반면 천연가스, 원자재 등 수입 가격 인상 부담은 엔저로 배가되고 있다. 기대한 효과 대신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고, 수입품 값이 올라 일본 소비자만 가난해진다는 게 ‘나쁜 엔저’ 논란의 핵심이다.
▷원유,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3, 4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가 나면서 한국도 ‘나쁜 원저’를 고민해야 할 처지다. 작년 100대 기업의 해외법인 매출이 국내 매출과 맞먹을 정도로 한국 기업의 생산시설도 이미 해외로 많이 이전돼 수출 증대 효과가 줄었다. 미국, 유럽연합(EU)이 ‘자국 내 생산’을 강조하면서 반도체, 배터리 분야 신규 투자도 대부분 해외에서 이뤄진다.
▷일본은행은 최근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방향을 바꾸기도 어렵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6%로 금리를 올리면 정부 이자 부담이 폭증해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질 수 있다. 재정 사정이 일본보다 나은 한국은 금리를 올려 원화 가치를 지킬 수 있지만 막대한 가계부채 탓에 경기 침체가 우려된다. 서둘러 초격차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도 일본의 뒤를 이어 더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