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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진영]바이든의 스탠딩 개그

입력 | 2022-05-03 03:00:00


미국 대통령이 의회에서 하는 국정연설 못지않게 신경 쓰는 것이 백악관 출입기자단이 주최하는 만찬 연설이다. 거물급 정치인과 기업인, 연예인 등 2000여 명 앞에서 하는 20분 분량의 ‘스탠딩 개그’다. 대통령은 누구든 풍자할 수 있는 ‘모두까기’ 권한을 부여받지만 가장 큰 박수가 터져 나오는 대목은 ‘자학 개그’를 할 때다.

▷지난달 30일 만찬에 참석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오늘 밤 나보다 지지율이 낮은 유일한 미국인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는 조크로 말문을 열었다. 자신의 저조한 지지율과 인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인 언론을 모두 유머 소재로 삼은 것. 79세의 초고령으로 건강 이상설이 끊이지 않는 약점은 이렇게 꼬집었다. “내가 대통령이 되자 ‘미국의 새로운 아버지’라고 하더라. 내 사람이 되고 싶은가.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쓰면 된다.”

▷임기 말 연설일수록 ‘자학’의 정도도 심해진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공화당 대선 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언급하며 “매케인 의원은 오늘 안 왔다. (인기 없는) 나와 거리를 두고 싶을 것”이라고 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집무실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보면 모두 힐러리를 찾는 전화라고 했다. 각종 스캔들에 대해선 “8년간 기자 여러분에게 20년 분량의 기삿거리를 제공했다”고 눙쳤다. ‘코미디 최고사령관’으로 불렸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주 만난 영국 조지 왕자는 샤워가운을 입고 나왔다. 외교의전을 무시하다니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라고 말해 폭소를 끌어냈다.

▷백악관 기자단 연설은 국정연설처럼 한 달 전부터 연설 담당 보좌관들이 준비한다. 100개의 유머 아이디어를 수집해 20개를 추려내는데, 원칙이 있다. 첫째, 자화자찬은 금물. 전혀 웃기지 않다. 둘째, 국가 안보나 남의 외모를 소재로 삼지 않는다. 셋째, 자학 개그가 중요하다. 그래야 남도 깔 수 있다. 유명 방송인을 초대해 대통령 면전에서 대통령을 풍자하기도 하는데 올해는 코미디언이 참석해 물가 급등과 우크라이나 전쟁 대응을 신랄하게 꼬집었고 바이든도 박장대소했다. “여기는 러시아가 아니다. 대통령을 비판해도 감옥 가지 않는다.”

▷백악관 기자단 만찬은 1924년 시작된 연례행사로 “언론은 국민의 적”이라 했던 도널드 트럼프를 제외한 역대 모든 대통령이 참석했다. 최고 권력에 대한 뼈 있는 농담으로 모두가 즐거운 만찬은 대통령과 언론 자유를 위한 건배로 끝나기 마련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목숨 걸고 취재하는 언론인들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자유로운 언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좋은 언론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