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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차디찬 겨울, 1위 팀 주축 불펜으로 거듭난 불혹의 고효준

입력 | 2022-05-03 13:27:00


지난달 30일 열린 잠실 SSG-두산 경기. SSG가 2-1로 앞선 6회 1사 1, 2루에 마운드에 오른 고효준(39)은 볼넷 1개를 내줬지만 삼진 2개로 급한 불을 껐다. 7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고효준은 무실점 투구를 이어갔다. 7회 2사 1루에서 두산 간판타자 김재환(34)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고효준은 순간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한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팬들 앞에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다. 고효준은 “나도 모르게 큰 제스쳐가 나왔다. 예전에는 움츠러들어 있었는데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 같다”며 이날 상황을 설명했다.

한국나이로 올해 불혹인 고효준은 3년 전부터 찬 겨울을 보냈다. 2019시즌이 끝나고 첫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기쁨도 잠시, 당시 소속팀이던 롯데와 진통을 겪은 끝에 이듬해 개막 직전에야 사인을 해 처음 ‘나 홀로 훈련’에 돌입했다. 2020시즌이 끝나고 방출돼 또 외로운 훈련을 했다.

지난해 2월 LG와 계약해 현역연장에 성공했지만 시즌 직후 또 방출됐고, 친정팀 SSG 유니폼을 입던 1월까지 개인훈련을 했다. 기약 없던 기간 동안 팀 훈련장보다 찬바람을 덜 맞고 달리기 위한 ‘아파트 지하주차장’, 캐치볼 상대가 없어 공 튕기기라도 하기 위해 찾은 공터 ‘벽’이 더 익숙한 훈련장소가 됐다. SSG와 비교적 일찍 계약해 3년 만에 스프링캠프에도 합류할 수 있게 되자 당시 고효준은 “마음이 편하다”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2016년 이후 6년 만에 돌아온 친정팀에서 고효준은 방출선수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 활약을 펼치고 있다. 개막 엔트리에 들었지만 대기만 하다 한 차례 2군에 다녀온 뒤 지난달 19일부터 본격적으로 마운드에 오른 고효준은 7경기에 등판해 총 8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0’(통산 5.27)을 유지하고 있다. 역동적인 투구 폼, 빠른 패스트볼이 일품이지만 ‘영점’이 잘 안 잡혀 9이닝 당 볼넷이 통산 6.04개였지만 올해는 2.25개로 크게 낮아졌다. 피안타율은 0.038(통산 0.250), 이닝당 출루 허용률(WHIP)은 0.38(통산 1.60)로 여러 지표를 봤을 때 ‘특급’이라 불릴 만 하다.

비결은 SSG 김원형 감독이 ‘발상의 전환’이라고 표현한 피칭 디자인이다. 고효준과 선수생활을 같이 하고 롯데 시절 코치로도 지도해 누구보다 고효준을 잘 아는 김 감독은 패스트볼 일색이던 고효준의 투구 패턴에 변화를 줬다. 변화구 제구가 나쁘지 않은 고효준이 타자와 승부할 때 초반부터 슬라이더, 포크볼 등 변화구를 던져 유리한 볼 카운트를 가져가게 하며 자신의 장기를 발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자기 철학이 확고할 연배지만 고효준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했고 좋은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현역 내내 5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던 고효준의 패스트볼 구사율은 올해 25.8%로 뚝 떨어졌다. 대신 슬라이더 구사율이 60.5%인 ‘변화구 투수’가 됐다. 가끔 보여주는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145km로 쏠쏠해졌다. 최근 5년 사이 가장 빠르다.

왼손 불펜 주축으로 활약해온 김태훈(32)이 부진으로 퓨처스리그(2군)에 내려가면서 SSG 마운드에는 시즌 초반 큰 구멍이 생길 뻔 했다. 하지만 고효준이 ‘인생 활약’으로 이 공백을 채웠다. 시즌 개막부터 마운드의 힘으로 선두로 치고 올라간 SSG는 한달 넘도록 10개 팀 중 가장 탄탄한 마운드(2일 현재 평균자책점 2.85)를 자랑하며 1위를 지키고 있다.


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