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승리의 주역인 전함 삼단노선(三段櫓船). 앞머리의 충각(衝角)으로 적선들을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관계는 삼국시대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와 비슷한 점이 많다. 작은 나라들에 흩어져 살며 서로 다투던 그리스인들에게 페르시아는 맞서기 힘든 거대 제국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가 복종을 요구하자 그리스인들은 전쟁을 택했다. 그들에게 자유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기 때문이다. 결과는 의외였다. 라이트급과 헤비급의 권투 같은 전쟁에서 라이트급이 두 번이나 이겼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기원전 525년∼기원전 456년)는 이 전쟁의 기억을 ‘페르시아인들’에 담았다.》
페르시아 대군 물리친 그리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의 제1차 침공(기원전 490년)을 막아낸 일은 거의 요행이었다. 전쟁의 불씨는 페르시아 총독이 지배하던 아나톨리아 지방(현재 터키 북서부)의 그리스인들이 일으킨 반란(기원전 499년)이었다. 반란은 쉽게 제압됐지만, 페르시아인들은 배후에 주목했다. 특히 아테네인들이 눈엣가시였다. 감히 제국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지원한 자들에게 분노한 ‘대왕’ 다리우스는 불손한 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위협 정도로 끝날 전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은 마라톤 전투에서 일격을 당하고 물러났다.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직접 참전한 살라미스 해전을 소재로 ‘페르시아인들’을 썼다. 작품에서 그는 그리스의 승전보다 페르시아를 궁지에 몰아넣은 인간의 교만에 초점을 맞췄다. 독일 화가 빌헬름 카울바흐가 그린 ‘살라미스 해전’(1868년). 그리스는 좁은 물길로 적을 유인해 세 배가 넘는 적의 함선을 격파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
아이스킬로스는 두 차례 전쟁의 산증인이었다. 그는 35세 때 마라톤 전투에 참전해서 승리의 영광을 맛봤지만, 친형을 잃는 슬픔도 함께 겪었다. 10년 뒤 살라미스 해전 역시 그의 전쟁터였다.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사람의 기쁨은 어떤 것일까? 명량의 조선 수군들은 같은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아이스킬로스는 ‘비극의 창조자’이고 비극경연에서 13번 우승한 최고의 비극작가였지만, 유명한 작가보다 무명의 전사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의 비문에는 그런 바람이 담겼다. “이 무덤에 에우포리온의 아들, 아테네의 아이스킬로스가 묻혀 있다. (중략) 그의 용맹은 마라톤의 숲과 그를 아는 숱이 많은 장발의 페르시아인이 전해주리라.”
기원전 472년, 살라미스 해전 8년 뒤에 공연된 ‘페르시아인들’은 패자의 관점에서 사건 전체의 의미를 밝히는 비극 작품이다. 무대는 페르시아의 왕도 수사의 왕궁, 원로들이 전쟁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알 수 없는 불안이 그들을 짓누른다. 크세르크세스의 어머니 아톳사의 꿈 이야기가 불안을 가중시킨다. 꿈에 크세르크세스의 마차에 매이기를 거부한 여인이 나타났던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사자를 통해 처참한 패전이 전해지면서 왕궁은 온통 탄식과 절망으로 가득 찬다. 곡성 속에서 선왕(先王) 다리우스의 혼령까지 불려 나온다.
혼령의 등장과 발언은 이 작품의 반전(反轉)이다. 역사적 사건 묘사가 그 의미에 대한 해석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왜 페르시아에 이런 재앙이 닥친 것일까? 신의 뜻일까, 사람의 잘못인가? 신의 개입 없이 이뤄지는 일이 없다면, 페르시아의 패전도 신의 뜻이다. 하지만 그런 신의 개입을 초래한 것은 분수를 모르고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크세르크세스의 잘못이다. 그는 그리스로 건너가기 위해 파도치는 바다에 채찍질을 가하고 배다리를 엮어 “바다의 등에 멍에를 씌웠다”. 한낱 인간이 신적인 영역에 도전한 것이다. 아들의 잘못을 준엄하게 따지는 다리우스는 누더기를 걸치고 왕궁에 도착한 크세르크세스와 대조적이다. 아버지는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제국을 이끈 ‘대왕’, 아들은 무모한 전쟁으로 재앙을 자초한 ‘어리석은 정복자’이다.
‘페르시아인들’의 경고
누군가 우리 삶의 터전을 짓밟고 도망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저주하고 조롱할 것이다. 반대자를 향해 손가락질과 욕설을 일삼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매일 본다. ‘페르시아인들’은 다르다. 이 작품에는 침략자에 대한 분노도, 패배자에 대한 경멸도 없다. 관객들은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불안, 파멸을 자초한 아들에 대한 부모의 탄식, 험한 몰골로 귀환한 패전 군주의 절망을 함께 보고 느끼면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자만이 낳은 비극과 대면한다. 어떻게 전쟁의 참상을 겪은 작가가 그토록 냉정할 수 있을까? 아이스킬로스는 왜 골리앗에 맞선 다윗처럼 대제국을 물리친 그리스의 위대함을 찬양하지 않을까?
아이스킬로스의 관심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인들’의 관심사는 적개심을 조장하는 것도, 승리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이 비극 작품에는 민주정의 우월함에 대한 확신이 깔려 있다. 살라미스 해전을 전하는 사자의 보고는 그리스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에 시간을 초월한 영원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작가의 진짜 의도는 더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에게는 크세르크세스의 비극을 통해 ‘인간의 히브리스(hybris)’를 경계하고 신적인 정의를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제국의 땅에 만족하지 못하고 바다 건너를 넘봤던 페르시아인들도, 공연을 보며 승리의 기억을 되살리는 아테네인들도, 아니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히브리스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그는 보여주려고 했다.
‘히브리스’는 그리스의 현자들이 가장 경계한 인간의 악덕이다. 분수를 모르는 태도와 행동이 모두 히브리스다. 인간의 한계를 무시하고 신적인 힘과 자연 질서에 도전하는 것, 권력의 한계를 모르고 정복과 지배를 추구하는 것, 만족을 모르고 부의 축적에 몰두하는 것, 앎의 한계를 모르고 과도한 확신에 사로잡히는 것. 이 모든 히브리스가 파멸을 부른다. 그러니 히브리스에 의한 파멸이 어찌 크세르크세스 한 사람의 운명이겠나? 그런 뜻에서 분수를 몰랐던 정복자의 파멸을 무대에 올린 ‘페르시아인들’은 모든 인간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분수를 지켜야 한다. 일단 교만(hybris)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된다.”(‘페르시아인들’, 820∼822행, 천병희 옮김)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