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세상을 떠난 배우 강수연은 한국영화계가 낳은 최고 스타이자 한국영화를 처음으로 국제 무대에 알린 최초의 한류스타였다. 또 아역배우에서 당대 최고 청춘스타로, 청춘스타에서 연기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며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은 전설적인 배우이기도 했다. 한국영화를 누구보다 아끼고 후배 영화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존경받은 선배 영화인이었으며, 술자리에선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외치며 남성 중심의 영화계를 휘어잡은 여성이기도 했다.
1966년생인 강수연은 우리 나이로 네 살 때인 1969년부터 동양방송(TBC) 전속 아역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미 배우로 전성기를 맞는다. 1983년에 출연한 KBS 드라마 ‘고교생일기’가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며 스타덤에 올랐고, 고등학교 졸업 후엔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2’(1985)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성인 연기자로서 경력을 시작한다. 이후 2년 뒤인 1987년 이규형 감독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에서 박중훈과 호흡을 맞추며 당대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그해 강수연은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를 연달아 흥행시켰고, 대종상 여우주연상까지 받았다.
강수연의 연기 인생은 임권택 감독을 만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임 감독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이틴 스타에 가까웠다면, 임 감독과 함께한 뒤부터는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강수연의 이같은 성과는 여성 배우로서 가져가야 할 전형적인 이미지를 깨면서 이뤄낸 것이라는 점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씨받이’에선 명문가에 씨받이로 들어간 여자 ‘옥녀’를 맡아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였고,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선 속세에 아픔을 느끼고 여승이 되려는 여자 ‘순녀’를 맡아 삭발도 마다하지 않는 열연을 펼쳤다.
이후 강수연은 1990년대 중반까지 연기 인생 절정을 달렸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안의 블루’(1992) 등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최고 흥행 배우로 자리잡았고, 이 과정에서 그는 대종상·청룡영화상·백상예술대상 등 국내 대표 영화상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는 한국영화계에 여성 배우로는 독보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여성 배우 최초로 억대 출연료를 받기도 했다. 강수연이 ‘그대안의 블루’ 출연료로 받은 돈은 2억원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영화계 세대교체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강수연의 입지도 약화됐다. 다만 그는 이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등 페미니즘에 기반한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며 서서히 잊히는 줄 알았던 강수연은 TV 드라마로 화려하게 부활하는 데 성공했다. 2001년 SBS TV 드라마 ‘여인천하’로 14년만에 안방 극장에 복귀한 그는 주인공 ‘정난정’ 역을 맡아 1년 6개월 간 극을 이끌며 열연을 펼친 끝에 SBS 연기대상을 받는다. 시청률은 30%에 육박했는데, 여성이 주인공인 사극으로는 유래 없는 시청률이었다. 강수연은 ‘여인천하’에 출연하면서 회당 출연료 500만원을 받아 당시 최고 출연료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수연은 이처럼 한국영화계를 누구보자 지지하고 후배 영화인을 아낀 것으로도 정평 나있다. 그가 배우로서 전성기를 구가할 때도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을 때도 배우·스태프들에게 밥과 술을 아낌없이 사줬다고 한다. 말술이었던 강수연은 남성 중심이었던 영화판을 휘어잡으며 후배들을 향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수연과 술자리를 하며 이 모습을 본 류승완 감독이 강수연의 이 말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 영화 ‘베테랑’에 대사로 집어넣기도 했다.
한동안 연기 활동을 쉬었던 강수연은 최근 복귀를 준비 중이었다. 연상호 감독의 영화 ‘정이’에 배우 김현주와 함께 캐스팅 돼 촬영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