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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특정조차 못한 ‘시약산 살인사건’…12년 만에 미제로 남나[현장속으로]

입력 | 2022-05-10 14:07:00

부산 서구 서대신동 시약산의 한 체육공원에 ‘목격자를 찾는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지난해 4월 3일 새벽 이곳에 혼자 오른 70대 남성이 누군가 휘두른 흉기에 살해됐다. 경찰은 용의자를 추적 중이지만 1년째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여기를 지날 때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1년 전 꼭두새벽에 발생한 흉측한 사건이 자꾸 생각나서….”

9일 오후 부산 서구 서대신동 시약산(해발 510m) 3부 능선에 조성된 체육공원 앞. 산 아래 마을에 사는 70대 여성은 고추 재배에 쓸 마른 대나무 대여섯 개를 주워 내려가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장 곳곳에는 ‘목격자를 찾습니다’, ‘산길,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등의 안내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색이 바랜 채 걸려 있었다. 살인사건 발생 13개월이 지났지만 경찰은 용의자 특정조차 못 하고 있다.


● 13개월째 용의자 특정 못해 미궁

사건이 발생한 것은 지난해 4월 3일 오전 6시 반경. 흉기로 얼굴과 목 부위에 수십 차례 찔린 A 씨(74)가 체육공원 입구 돌탑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등산객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A 씨는 근처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로 이미 숨진 상태였다.

A 씨의 사망 시점은 이날 오전 5시 반에서 6시쯤일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A 씨는 이날 오전 5시경 사건 현장에서 200여m 아래에 있는 집을 나와 ‘시약산 17번 가길’을 통해 산으로 향하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담겼다. 비슷한 시각 같은 길을 통해 산으로 간 사람은 A 씨 외에는 없는 것으로 CCTV를 통해 파악됐다.

부산경찰청은 사건 초기 70여 명으로 꾸려진 전담팀을 가동해 수사를 벌이다 지금은 프로파일러가 포함된 장기미제수사팀과 서부서 강력팀 등 10명이 사건을 맡고 있다. 그동안 경찰은 CCTV 100여 개와 차량 블랙박스 54개를 분석했고, A 씨 집 근처에 살거나 원한·채무 관계에 있던 1400여 세대를 탐문 조사했다. A 씨의 통화기록을 통해 사건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도 추적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용의자의 나이대나 성별 등의 정보가 전혀 안 드러났다.

목격자도 전혀 없는 상황이다. 제보는 단 한건 접수됐으나 이마저도 거짓 신고였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 발생일 낮에 비가 내려 증거가 될만한 혈흔 등이 씻겨져 내려간 점도 수사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 부산에서 12년 만에 장기미제 될 가능성도

경찰은 지금까지의 수사를 바탕으로 범인이 성인 남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키 175㎝에 80㎏ 체격을 가진 A 씨를 여성이 살해할 개연성은 떨어져서다. 또 사건 발생 전후 A 씨와 같은 등산로를 이용한 사람이 CCTV나 블랙박스에 나타나지 않은 점을 근거로 A씨 집 근처에 사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심 가운데 있는 산의 체육공원에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곳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A 씨가 이용한 길 외에도 사상구와 사하구에서 출발하는 길 등 여러개 있다.

경찰은 또 ‘계획살인’이 아닌 ‘우발적 범행’일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살해 계획이 있었다면 주방도구로 쓰이는 흉기 등을 준비해 A 씨의 급소를 겨냥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범인은 보통의 범행현장에서 쓰이지 않은 도구로 A 씨의 얼굴 부위를 수십 차례 긋거나 찔렀다. 경찰이 상흔 등을 토대로 추정한 흉기는 길이 7㎝, 넓이 3㎝ 정도의 짧은 도구다.

경찰은 통상 1년 동안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장기미제사건’으로 분류한다. 서부경찰서는 상반기인 다음달 말까지 용의자의 단서가 잡히지 않으면 사건을 부산경찰청 장기미제수사팀으로 넘길 계획이다. 2010년 ‘부산진구 모텔 여주인 살인’ 이후 12년 만에 부산에서 장기미제사건이 나올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동의대 최종술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사건이 장기미제로 분류되면 증거나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하기 더 어려워진다”며 “한 달 내 해결한다는 각오로 경험 많은 베테랑 형사를 추가 투입하는 등 수사 인력을 확충해 사건을 면밀히 다시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화영 기자 r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