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우크라 남의 일 같지 않아” 핀란드 12일 나토 가입 발표

입력 | 2022-05-11 03:00:00

핀란드 현지 르포



러시아 가는 헬싱키발 열차 노선 폐쇄 10일 핀란드 수도 헬싱키 중앙역의 텅 빈 9번 승강장 의자에 한 시민이 앉아 있다. 이 승강장은 헬싱키와 이곳에서 380km 떨어진 러시아 2대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는 기차가 서는 곳이다. 핀란드는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안보 불안이 고조되자 3월 말 이 노선을 폐쇄했다. 헬싱키=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헬싱키=김윤종 특파원


“우크라이나 사태는 1939년 핀란드의 판박이예요.” 10일(현지 시간) 핀란드 수도 헬싱키 구시가지의 원로원 광장. 대통령궁이 있는 이곳은 쌀쌀한 날씨만큼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민 엘리아 씨(37)는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83년 전 러시아 침공을 받은 핀란드 역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의 군사 위협으로) 복잡한 상황이 될 수 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은 나토 가입에 대한 공식 입장을 12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침공 빌미로 삼은 러시아가 1948년 이후 74년간 군사적 비동맹 정책을 유지해 온 중립국 핀란드의 나토 가입이라는 역풍을 맞는 셈이다. 핀란드 최대 일간지 헬싱긴 사노마트는 “나토 가입이 불행한 결과(군사 충돌)를 낳는다 해도 반드시 지지해야 하는 역사적 결정”이라고 전했다.




“소련에 땅 뺏긴 겨울전쟁 떠올라” 핀란드내 나토가입 찬성 확산






핀란드 수도 헬싱키 르포
우크라戰뒤 중립 유지 정서 사라져 “러軍의 민간인 학살도 영향 미쳐
좌파에서도 가입 반대 목소리 안내”
12일 핀란드 나토 가입 발표 이어 스웨덴도 15일 가입 결정할 듯
내달말 나토회의서 최종가입 확정… 러 “발트해에 핵무기 배치” 경고



“러시아로 가는 열차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10일 핀란드 수도 헬싱키 중앙역의 텅 빈 9번 승강장에서 만난 시민 로라 라이네 씨는 “이곳에서 열차를 타고 종종 러시아로 여행을 갔지만 이제 다 추억이 됐다”고 했다.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핀란드는 헬싱키와 약 380km 떨어진 러시아 2대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는 노선을 3월 말 폐쇄했다.

이 역은 핀란드가 러시아 지배를 받던 시절인 1862년 건립됐다. 9번 승강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는 기차가 정차하던 곳이다. 핀란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과거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던 핀란드는 열차 노선 폐쇄에 그치지 않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결정까지 앞두고 있다.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이 12일 나토 가입 방침을 밝히면 외교안보정책 각료위원회가 개최돼 이르면 15일 나토 가입 신청이 최종 공표될 것으로 전망된다. 산나 마린 총리도 14일 가입 찬성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1814년부터 200여 년간 어떤 동맹에도 참여하지 않은 중립국 스웨덴도 집권 사회민주당이 15일 나토 가입 여부를 결정한다고 밝혔다. 중립 전통을 지켜온 두 국가의 연쇄 나토 가입이 이뤄지면 유럽 안보 지형에 대격변이 불가피하다. 두 나라의 나토 가입 움직임에 핵 위협을 가해 온 러시아가 확전을 감행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워졌다.
○ 우크라 사태가 ‘겨울전쟁’ 악몽 되살려
이날 기자가 헬싱키에서 만난 10여 명의 시민은 이구동성으로 “나토 가입 찬성 여론이 매우 높다”고 입을 모았다.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자던 오랜 전통의 ‘노르딕 밸런스(Nordic Balance)’ 정서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했다.

숙박업소에 근무하는 제나 씨는 “과거처럼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자는 반대 의견이 거의 사라졌다”고 했다. 보통 찬반이 반반씩 나오던 여론이 최근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다음은 핀란드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등이 나토 가입 찬성 여론을 대폭 증가시킨 원인이라고도 전했다.

의석수 200석인 핀란드 의회도 의원 122명이 나토 가입을 지지하고 있다. 현지 외교 소식통은 “그간 좌파 진영에서는 러시아를 불필요하게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나토 가입에 부정적이었지만 이런 목소리도 사라졌다”고 전했다.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40년 소련의 침공을 받아 일명 ‘겨울전쟁’을 치렀다. 온 국민이 저항했지만 약소국의 한계가 뚜렷했다. 결국 영토의 11%를 뺏긴 후에야 휴전 협상을 맺었다. 1948년 옛 소련의 우호 조약을 체결한 후 나토 가입을 포기했다. 이런 기억이 생생한 장노년층은 “우크라이나 사태는 80여 년 전 핀란드의 판박이”라며 러시아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핀란드 현지에서는 서구 일부에서 중립주의를 지칭할 때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는 대가로 자율성과 독립을 보장받은 탓에 ‘핀란드화’란 말을 굴욕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 망설이던 스웨덴도 나토 가입 예상

니니스퇴 대통령은 17일경 스웨덴을 국빈 방문해 스웨덴 정부와 나토 동시 가입을 논의할 예정이다. 핀란드와 스웨덴이 나토에 가입하면 이미 가입한 노르웨이, 덴마크와 함께 북유럽 4개국이 모두 나토 회원국이 된다.

스웨덴은 1814년부터 208년간 비동맹 및 중립주의를 지켜 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는 집권 사민당은 물론이고 제1야당 보수당도 나토 가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핀란드가 나토 가입을 기정사실화한 데다 9월 총선을 앞두고 있어 여야 모두 북유럽국 중 유일하게 나토 미가입으로 남기에 정치적 부담이 커졌다. 로이터통신은 “사민당이 15일 나토 가입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며 스웨덴의 나토 가입이 유력하다고 봤다. 양국이 나토 가입을 발표하면 다음 달 29일부터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나토 회의에 신청서가 제출된 후 회원국의 동의를 얻어 최종 가입이 확정된다.



헬싱키=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